최근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며 우리 인생의 기적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기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몇 해 전 가을, 라디오 작가로 일할 때 일이다. 매일 오후 4시에 소소한 일상을 전하며 노래를 틀어주는 방송이었는데 한 청취자가 진지한 사연을 보냈다.
저에게는 5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습니다. 5년 동안 만나면서 한 번도 안 싸울 정도로 마음이 잘 통했습니다. 사귄지 5년째 되던 날 남자 친구는 프러포즈를 했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결혼 날까지 잡았는데, 제가 최근 소화가 잘 안 돼서 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대장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부둥켜안고 울었고 남자친구도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좌절감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해준 덕분에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힘든 시간을 잘 견딘 덕분인지 “상태가 좋아졌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고생해준 남자 친구가 너무 고마웠고, 우린 예전처럼 데이트를 즐기고 연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연을 소개하는 동안 DJ였던 김창열 씨는 눈시울이 벌게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청취자 문자가 쇄도했다. 그날 라디오 초대가수가 바비킴이었는데 두 사람의 사랑 얘기에 감동 받았다며 그 자리에서 라이브로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를 불러줬다. 이날 방송은 많은 사람에게 회자 됐고 유명 아나운서가 두 사람의 결혼식 사회를 봤으며 가수 DJ DOC가 축가를 불렀다. 방송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가끔씩 방송에 문자를 보냈고 1년 넘게 소식을 전한 걸로 기억한다. 살아서 다시 만나는 게 기적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에 두 분도 여전히 기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