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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전술적 패배’가 필요하다[국방 이야기/손효주]

입력 | 2019-11-26 03:00:00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1차장이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손효주 정치부 기자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열린 22일 복수의 군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이들은 “이렇게까지 예측이 안 된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앞서 8월 22일 NSC가 열릴 때만 해도 “지소미아는 연장될 것”이라고 자신하던 군 관계자가 많았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8월 22일 연장이 예상되던 지소미아가 NSC에서의 ‘막판 뒤집기’로 종료하는 것으로 결론 난 이후 군 관계자들은 자신감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이달 22일 NSC를 앞두고는 “청와대가 어떤 결정을 할지 감을 못 잡겠다”거나 “청와대가 너무 즉흥적”이라는 불만도 나왔다.

군 고위 관계자 A는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결정이 나기 전 군 입장을 묻자 “지소미아 문제는 청와대가 결정하고 국방부는 이를 집행하면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소미아 주무부처인 국방부가 지소미아 운명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별다른 결정권도 없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군 안팎에선 특히 어느 사안보다 예측 가능한 범주에서 안정적으로 관리돼야 할 안보 사안이 막판 변수에 따라 뒤집히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높았다.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은 지소미아가 8월 22일엔 종료로, 이달 22일엔 조건부 연장으로 결론 난 것을 두고 “중대 안보 사안 결정을 예측 불가능한 도박처럼 진행하는 건 무책임한 행위”라고 했다. 이어 “개인이 도박을 하면 개인 주머니가 비지만 안보 도박은 국가 존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방부는 이달 22일 NSC 직전까지 지소미아 살리기에 사활을 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소미아 종료 시 주한미군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밝히는 등 지소미아 종료를 미국의 안보 이익에 대한 침해로 봤다. 이 때문에 지소미아가 종료되면 미국이 방위비 증액을 더 강하게 압박하거나 미군 정찰위성 등으로 수집한 대북 중요 군사정보를 한국군과는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군 내엔 많았다. 이는 한미동맹의 붕괴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군 고위 관계자 B가 지소미아 종료 강행 상황을 두고 “최악의 상황”이라며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소미아가 극적으로 조건부 연장됐지만 군은 오히려 더 불안해하고 있는 듯하다. 군 관계자는 현 상황을 “하늘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 더 불안한 상황”이라고 했다. 조건부 연장이라는 애매한 결정이 내려지면서 상시적으로 마음을 졸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건부 연장 발표 직후부터 한일 각자가 “외교적 승리”라거나 “판정승”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존심 대결이 격화되면서 지소미아 운명은 더 위태로워졌다. 군 관계자들이 “조건부 연장으로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격이 됐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현역 장교는 “군이 언제 지소미아가 종료될지 몰라 항상 긴장하게 되면 군 본연의 임무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며 “언제든 헤어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관계로는 정부가 일본과의 대북 군사 정보 공유 계획을 세우고 안정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김성한 전 외교통상부 제2차관은 “미국 입장에서 조건부 연장은 한국이 수류탄을 들고 여차하면 안전핀을 뽑겠다고 하는 격”이라며 “이런 동맹국을 미국이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소미아를 조건부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연장해 이런 불안이 해소되면 국방부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산적한 국방 현안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상 연장을 주장한 국방부 의견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군의 자신감이 회복되는 건 물론이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종종 ‘전술적 패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소미아의 조건 없는 연장이라는 통 큰 결정으로 한미동맹의 신뢰가 회복되고 동맹이 공고해질 수 있다면, 설령 당장엔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외교적 승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손효주 정치부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