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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나’[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입력 | 2019-11-27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엄마는 늘 주는 존재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겪었으니 커서도 그러기를 자식은 바랍니다. 정신분석학도 전에는 엄마를 그런 식으로만 보았습니다. 창시자 프로이트 생전에는 엄마를 자신의 삶과 주관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 아이의 욕구와 소망을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정신분석가도 ‘거울’과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피분석자의 마음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비춰줘야 하니 분석가에게 익명성과 중립성을 강조했습니다. 분석가의 ‘나’는 드러내지 않을수록 바람직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로이트 이론에 무조건 동조하지는 않았던 영국의 대상관계학파조차도 엄마는 아이의 욕구와 소망을 받아주고 마음의 혼란을 정리해주는 대상으로만 보았습니다. 엄마의 ‘나’, 즉 엄마의 욕구, 소망, 꿈, 삶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엄마의 주관성에 별 관심을 쏟지 않는 이론들을 모아 ‘1인 심리학’이라 부릅니다. 1인 심리학이 보는 엄마는 아이가 제대로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활용해야 할 수단입니다. 엄마 자신이 겪는 불안, 공포, 좌절, 우울 같은 부정적인 경험은 단순하게 말하면 오직 어떤 영향을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끼칠까 하는 관점에서만 다루어집니다. 엄마는 대상으로만 여겨졌습니다. 지금 보면, 상식적으로도 엄마는 당연히 사람이고, 여성학의 측면에서도 보완이 필요한 관점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 ‘관계 정신분석학’이라는 명칭의 학파가 미국에서 등장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븐 미첼이라는 뛰어난 이론가의 주도로 정신분석학의 판을 바꾸겠다며 야심 찬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럽에서 수입된 프로이트의 ‘정통 정신분석학’과는 달리 미국 출생의 정신과 의사 해리 스택 설리번이 창시한 ‘대인관계 심리학’을 기반으로 영국의 대상관계학파 이론을 더했습니다. 즉, 밖에서 작용하는 대인관계와 안에서 움직이는 대상관계가 합쳐진 ‘관계의 무대’에서 성격이 발달하고 심리적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으며 아이의 주관성뿐만이 아니라 엄마의 주관성도 중요하게 여겨서 ‘2인 심리학’으로 분류합니다. 미첼은 박학다식하며 정교한 이론가, 단호한 토론자였습니다. 자신이 내세운 이론을 확신하는 관계 정신분석학파의 스타였습니다. 팬(?)처럼 따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불행하게도 환갑도 되기 수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아직도 슬픔에 잠기는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관계 정신분석학이 정신분석학의 지평을 확장했으나 성격 발달, 심리 발달, 갈등 관리를 오로지 관계의 관점에서만 보려다가 오히려 정신분석의 깊이를 잃어버리고, 다른 학파 이론들의 장점을 가려버린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관계 정신분석학의 관점을 일상에 적용한다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가족관계입니다. 현대와 전통 사회의 가족은 서로 크게 다릅니다. 풍족한 시대이지만 가족과 욕망의 구조가 급히 변하면서 갈등은 다양하고 심해졌습니다. 결혼을 미루고 부모와 같이 사는 나이 든 자식이 흔해지면서 자식이 부모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기간도 늘어났습니다. 동시에 평균 수명이 늘어난 엄마, 아빠가 언제까지나 자식의 욕구, 소망, 꿈만을 충족시킬 수 없음도 현실입니다. 부모도 욕구, 소망, 꿈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효(孝)의 개념도 흔들립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지만 세대 간에 의견은 엇갈립니다. 관계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효의 핵심은 엄마, 아빠도 자신의 삶이 있는, 자식을 위해 늘 희생하는 대상이 아닌, 독립적인 사람임을 자식이 인정하는 겁니다. 나를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엄마의 ‘나’, 아빠의 ‘나’도 깨닫고 존중해야 공정합니다. 부모, 자식의 공생(共生) 관계는 어려서는 약이나, 성장 후에는 독입니다. 부모는 삶의 방향을 잃고, 자식은 삶을 개척할 능력을 잃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각자의 삶이 지닌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해와 갈등이 이어집니다. 고유성의 상호 인정은 감정적이고 격렬한 논쟁이 아닌 내적 성찰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모의 ‘나’를 존중하지 못하면 집 밖에서도 다른 사람의 ‘나’와 충돌합니다. 다툼이 생깁니다. 사회적 갈등은, 나의 ‘나’는 존중받기를 요구하면서 남의 ‘나’는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둘째,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도 상호주관성으로 살피면 명백합니다. 정치인이 유권자를 한 표를 찍어줄 대상으로만 본다면 유권자의 형편, 유권자의 ‘나’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정치인 자신은 항상 ‘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유권자도 그렇습니다!

늘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있던 사람의 주관성을 깨닫고 이해하는 균형감이 마음을 넓게, 깊게 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정치인이 유권자의 주관성을 깨닫고 존중하면 자신들의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나의 ‘나’와 남의 ‘나’ 사이의 소통법은 평생 고심해야 할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관계 정신분석학파가 대중에게 전하는, 새겨들을 만한 메시지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