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의거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1919년 조선총독에 폭탄 던져 구속 “검찰 조사 중 때로 홍연대소 하고 시사 말할땐 탁자 두들겨” 기사 행간서 의기와 강단 드러나
강우규 의사가 1920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들어서고 있다. 동아일보DB
3·1운동 뒤인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855∼1920·사진). 그의 조사 과정을 묘사한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그해 10월 7일자 기사다. 기사는 “만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입을 꽉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아 일반 범인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 조사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일본 신문임에도 기사 행간에서 강 의사의 의기와 강단을 느낄 수 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장원호)는 강 의사의 순국 99주기인 29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의거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강우규 의거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개최한다.
민중들이 강우규 의거를 얼마나 통쾌히 여겼는지는 당시 일제 측 조사 자료에서도 알 수 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강우규 의사의 민족운동’에서 1919년 10월 21일 평안북도 지사가 보고한 ‘폭탄 범인 강우규에 대한 감상’의 한 단락을 소개했다.
“평안북도 철산군 지방에서의 유식계급자 간에 범인 강우규는 … 나이 60을 넘은 노구를 이끌고 멀리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경성에 잠입하여 … 그 용맹은 장자(壯者)를 능가하며 오인(吾人) 조선민족이 참으로 흔쾌하게 여기는바, 가령 극형에 처해져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라도 그 위훈(偉勳)은 조선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길이, 비사(秘史)상의 일(一) 미담으로서 전해질 것이라고 이를 상양(上揚·치켜올림)함과 같은 언동을 하는 자가 있다.”
박 교수는 “강우규 의거는 그 후 국내외 민족운동의 큰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학술회에서는 김중위 기념사업회 고문(전 국회의원)이 기조강연을 하고, ‘강우규 평전’의 저자인 은예린 씨와 한동민 수원박물관장이 토론자로 나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