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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사 조사 지켜본 日紙 “노인 맞나”

입력 | 2019-11-28 03:00:00

29일 의거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1919년 조선총독에 폭탄 던져 구속
“검찰 조사 중 때로 홍연대소 하고 시사 말할땐 탁자 두들겨”
기사 행간서 의기와 강단 드러나




강우규 의사가 1920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들어서고 있다. 동아일보DB

“폭탄 범인 강우규는 검사국으로 호송된 후 종로경찰서 미결감에 들어가 있는데 옥중에서는 매우 유순했다.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는 뭔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홍연대소하고 시사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거만한 태도가 되어 지사(志士)인 양 탁자를 두드리며 이야기하는 광경이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3·1운동 뒤인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855∼1920·사진). 그의 조사 과정을 묘사한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그해 10월 7일자 기사다. 기사는 “만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입을 꽉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아 일반 범인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 조사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일본 신문임에도 기사 행간에서 강 의사의 의기와 강단을 느낄 수 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장원호)는 강 의사의 순국 99주기인 29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의거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강우규 의거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개최한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발표문에서 오사카 아사히신문을 중심으로 강우규 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 보도를 살폈다. 김 연구위원은 “강 의사는 사람이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고, 일본 언론은 독립운동을 폄하하며 강 의사를 현실에 불만을 품은 과격파나 ‘무뢰한’으로 매도했다”고 밝혔다.

민중들이 강우규 의거를 얼마나 통쾌히 여겼는지는 당시 일제 측 조사 자료에서도 알 수 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강우규 의사의 민족운동’에서 1919년 10월 21일 평안북도 지사가 보고한 ‘폭탄 범인 강우규에 대한 감상’의 한 단락을 소개했다.

“평안북도 철산군 지방에서의 유식계급자 간에 범인 강우규는 … 나이 60을 넘은 노구를 이끌고 멀리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경성에 잠입하여 … 그 용맹은 장자(壯者)를 능가하며 오인(吾人) 조선민족이 참으로 흔쾌하게 여기는바, 가령 극형에 처해져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라도 그 위훈(偉勳)은 조선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길이, 비사(秘史)상의 일(一) 미담으로서 전해질 것이라고 이를 상양(上揚·치켜올림)함과 같은 언동을 하는 자가 있다.”

박 교수는 “강우규 의거는 그 후 국내외 민족운동의 큰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학술회에서는 김중위 기념사업회 고문(전 국회의원)이 기조강연을 하고, ‘강우규 평전’의 저자인 은예린 씨와 한동민 수원박물관장이 토론자로 나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