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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렉스’에 빠진 20대…불황에도 90년대생은 명품시장 ‘큰손’

입력 | 2019-11-29 16:04:00


지난 주말 서울의 한 백화점 샤넬 매장은 쇼핑은커녕 입장부터 쉽지 않았다. 대기 인원만 40명으로 매장에 들어가는 데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입장할 차례가 되면 휴대전화로 연락을 해주는 시스템까지 도입됐다. 매장에 겨우 입장해도 살 수 있는 제품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튀는 색깔이나 희귀 사이즈 제품만 있었다. 원하는 제품을 물어보니 “기다려야 한다. 언제 입고될지는 알 수 없다. 자주 들러 문의해 보는 게 가장 좋다”는 점원의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인근 다른 백화점 샤넬과 에르메스 매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매장 직원은 “당일에 원하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날 매장을 찾은 한 여성 고객은 “수백만 원을 주고도 마냥 기다려야 한다니 어이가 없다”면서도 점원에게 재입고 일정을 자세히 물었다. 온라인상에선 매일 특정 브랜드 매장의 제품 판매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같은 시각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등 주얼리 매장에도 긴 줄이 늘어섰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프라인 매장의 위기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 세대를 뛰어넘은 ‘럭셔리 홀릭’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있지만 고가 럭셔리 시장에선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인기 제품은 수백만 원의 높은 가격에도 입고되자마자 당일 제품이 모두 소진되고 있다. 일부는 판매되자마자 원래 가격의 50~100%가량 웃돈이 붙는다. 롯데백화점이 최근 40주년을 기념해 패딩 전문 브랜드 무스너클과 협업해 만든 컬래버레이션 제품은 가격이 100만 원에 달했지만 출시하자마자 400장이 모두 팔렸다. 이탈리아 시계 브랜드 파네라이가 지난해 말 내놓은 50개 한정판 모델 ‘서울 에디션’은 800만 원대지만 출시 전 이미 사전 예약 판매가 완료됐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1~6월 주요 유통업체 고가 럭셔리 제품 매출액은 전체의 10%대에 그쳤지만 6월 23.6%로 20%대에 진입한 뒤 지난달까지 이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백화점 상품군별 매출 비중에서 명품은 올해 1~3분기 내내 20%대를 기록하며 전체 상품군 중 가장 높은 점유율을 나타냈다.

성장하는 명품 시장은 국내 주요 백화점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롯데백화점은 2017년 5.5%에 머물렀던 럭셔리 제품 매출액 상승률이 올해 24.4%로 늘어났다. 신세계백화점은 올해 고가 럭셔리 상품 매출이 전년 대비 31.3%나 증가했다.

눈에 띄는 건 부쩍 낮아진 ‘소비연령’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 60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었던 럭셔리 제품은 이제 거의 모든 세대에서 소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영(Young)럭셔리’로 대표되는 20대 젊은층 고객이 크게 늘어났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전체 연령층에서 럭셔리 제품 매출이 지난해보다 가장 많이 늘어난 연령층은 20대로 26.9%나 증가했다. 롯데백화점도 20대의 명품 소비 매출이 29.1% 뛰며 전체 연령층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나타냈다.

주얼리·시계 분야에서도 ‘영럭셔리’의 소비는 두드러진다. 한 고급 시계 브랜드 관계자는 “기본 엔트리 모델이 1000만 원대로 고가인데도 20, 30대 구매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면서 “고가 시계 브랜드들이 전례 없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이들 젊은 고객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용카드 매출 통계에 잡히지 않는 10대까지 포함하면 럭셔리 상품을 소비하는 젊은 고객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올해 1월 패션브랜드 오프화이트와 컨버스가 협업한 컬래버레이션 제품 출시 당시 현장 곳곳에는 앳된 모습의 10대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한 고등학생은 “제품을 사기 위해 전날부터 노숙을 했다”고 말했다. 가품(假品)을 가지는 데 그쳤던 과거 10대와는 달리 진짜 명품을 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화점업계 관계자는 “최근 친구들끼리 매장을 찾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일반 운동화나 가방 2, 3개 살 수 있는 돈을 모아 명품을 사고 SNS에 올려 자랑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과시와 자기만족이 키운 럭셔리 열풍

럭셔리 제품을 소비하는 이유는 세대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10, 20대의 경우 또래를 대상으로 한 과시심리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SNS 등을 통해 퍼지는 유명 연예인들의 럭셔리 사랑도 한몫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젊은층에 어필하는 명품들의 공통점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이 많고,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들이 애용하는 브랜드”라며 “대중가요 속에 자주 등장하는 ‘플렉스’(‘돈 자랑을 하다’라는 뜻의 은어) 문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 초년생이나 일반 직장인의 경우엔 생활용품 같은 반복 소비 물품에 대해선 적은 돈을 들이면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작은 사치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이중적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과 불황이 이어지는 상황에선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과시하기 위해 고가 제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짙어진다고 분석했다.

이준영 명지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저성장 불황기에 소비 여력이 줄어든 소비자들은 역설적으로 자신만의 작은 사치를 위한 경제적 여력을 남겨둔다”며 “프리미엄이나 럭셔리 상품을 소비하며 자존감을 높이는 ‘가치소비’가 유행하며 사회적으로는 ‘소비의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제 불황 시기에 사람들은 침체돼 있는 기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과시적 성격이 강한 상징적인 상품을 원하게 된다”며 “극단적인 베블런 효과(가격이 오르는데도 일부 계층의 과시욕이나 허영심 등으로 인해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현상)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급격히 퍼지고 있는 ‘초저가 소비’와도 연관이 있다. 소비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산층의 구매력이 약화된 반면 고소득층은 경기 변동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명품 구매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는 해석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말부터 경기 상황이 악화돼 중산층을 이루는 자영업자들이 소득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대중적인 상품은 더 저렴하게 나오는 반면 고소득층은 충분한 자산을 바탕으로 경기의 영향을 받지 않아 명품을 구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도 “경제 침체기에도 고소득층의 명품 수요는 건재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극단적 소비 구조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준상 교수는 “경제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어 이러한 소비심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럭셔리 브랜드 “한국을 선점하라”

다음 달 갤러리아백화점에는 랑에운트죄네의 첫 공식 부티크가 문을 연다. 전 세계 톱5 시계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랑에운트죄네는 기본 엔트리 모델이 2000만 원대로 초고가 제품만을 취급한다. 롯데백화점에는 스위스 프리미엄 시계 브랜드 피아제 매장이 다음 달 6일 개장한다. 피아제 역시 시계 하나의 가격이 수천만 원에 달하는 초고가 브랜드다.

이처럼 럭셔리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최고급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에 앞다퉈 들어오는 것은 그만큼 국내 럭셔리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실제 브라이틀링, 파네라이 등 고급 시계 브랜드는 최근 국내에서 계속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시계업계 관계자는 “중국 일본 등과 달리 한국은 고급 시계 시장이 매년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고급 시계, 주얼리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이는 건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조윤경기자 yuniqu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