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식민지 관리 될 수 없다며 사퇴… 만주로 보낼 군자금 마련 안간힘 일인 고관-한인 반역자 처단도
박상진 총사령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친일 부호 처단 같은 작전을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펼침으로써 일제를 괴롭혔다. 그의 울산 생가에는 독립운동 전시관이 있다. 울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5년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독립군 지원단체 ‘대한광복회’가 결성됐다.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광복단이 합친 광복회는 무력투쟁을 목표로 했다. △부호의 의연금과 불법 징수 세금 압수해 무장 △만주에 군관학교 설치해 독립전사 양성 △일인 고관과 한인 반역자 처단 등 7가지를 실천 강령으로 정했다.(‘독립운동사’)
총사령에는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이 추대됐다. 그는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사퇴했다.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허겸 이상룡 김동삼 등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독립투쟁 방법을 모색했다. 1912년 귀국한 박상진은 대구에 독립운동 연락본부 격인 ‘상덕태상회’를 설립하고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하는 등 독립 지원을 꾸준히 준비했다.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에 협조하지 않는 부호들에게 살해 협박문을 보내고 경각심을 주기 위해 실제 처단에 나서기도 했다. 1917년 11월 경북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과 1918년 1월 충남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를 찾아가 죄를 알리고 처단한 게 대표적이다. 박용하 처단에 가담한 단원이 충남 천안에서 체포되면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 단원 대부분이 붙잡혔다. 박상진은 그해 2월 경주에 계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가 체포됐다. 박상진은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울산의 박상진 생가에서 만난 증손자 박중훈 씨는 “증조부는 내게 너무 큰 어른”이라며 “떳떳하게 후손이라고 밝힐 수 있는 자긍심보다 더한 정신적 유산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