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체결 주도했던 조태용 전 국가안보실 차장
[조영철 기자]
이번 결정을 어떻게 보나.
“추가적인 상황 악화를 막았다는 점에서 다행이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일관계 복원까지는 갈 길이 멀다. 벌써부터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강제징용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전 없이 수출규제 협의가 진전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난제 중 난제인 강제징용 문제 해결이 가능하려면 한일 정부 모두 관계 복원이 양국 국익에 바람직하다는 전략적 시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일본도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외교적 대화에 열린 마음으로 나왔으면 한다. 12월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정상 차원의 의지가 분명히 나와야 한다고 본다.”
우리로서는 얻은 것도 없이 뽑았던 칼을 집어넣은 격이 됐다.
“결과적으로 판단 착오였음을 드러냈다. 지소미아를 협상카드로 꺼내 든 것은 미국이 일본한테 대화하라고 압박하게 하려던 것인데 미국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물론, 거꾸로 우리를 압박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유가 뭐라고 보나.
“한미일 삼각관계와 한미동맹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동맹 사이에 뭔가 요청할 일이 있으면 막후에서 비공개로 하는 게 원칙이다.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공개적인 장으로 끌고 나오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미국이 움직이는 걸 원했다면 비공개로 ‘우리는 한미일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지소미아도 맺고 있는데 일본이 안보상 이유로 수출규제를 하니 여론이 부정적이라 우려스럽다. 전체적인 선순환을 위해 우리도 노력할 테니 미국도 일본을 설득해달라’ 식으로 말했어야 한다. 공개적인 미국 압박은 아주 예외적으로만 사용해야 할 극약처방이다. 더구나 우리 외교부 차관이 주한 미국대사까지 불러 한국 정부에 불만을 표시하지 말라 하고 이를 언론에까지 공개한 것은 한미동맹 역사에서 초유의 일이었다. 동맹국 사이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고 결과도 좋지 않았다.”
왜 지금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무능인가, 무지인가.
“외교부 자체 판단인지, 청와대 지침인지, 장관은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었던 건지 의문만 들 뿐이다. 팩트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전문 관료 집단인 외교부만이라도 노(No)를 했어야 하지 않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소미아 카드는 하이리스크 옵션, 다시 말해 고위험 부담을 가진 정책인데 목적은 항상 국익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나 외교안보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이 있어야 한다.”
워싱턴 내 한국 편 잃은 게 가장 큰 손실
“미국 고위 관료들이 동시에 공개적으로 한국 정부에 불만을 표출한 것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작용(한국)과 반작용(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방위비 분담부터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 자동차 관세 문제에 이르기까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철저히 미국 중심으로 상업적 이윤 추구에 기반한 결정을 할 텐데 그를 말릴 우리 편 한 사람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번 사태로 워싱턴 내 한미동맹 지지자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게 가장 큰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주변에서 말린다고 들을 사람인가.
“그래서 외교가 필요하다. 미국 정부와 의회, 국민 사이에서 한국 편을 많이 만드는 건 기본이고, 여기에 트럼프가 귀 기울이는 측근을 대상으로 한 외교 노력도 절실하다. 사위 래저드 쿠슈너, 딸 이방카,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될 수도 있고 트럼프와 친한 (미국 보수언론) ‘폭스뉴스’ 언론인이 될 수도 있다. 다른 나라들은 좀 하는 것 같은데…. 현재 주미 한국대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이런 측근 그룹과 긴밀한 의사소통이라고 본다.”
트럼프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런 측면이 있다.”
오히려 우리 외교 진용을 빨리 바꿔야 하지 않을까.
“현재 한미 간 신뢰 있는 대화가 잘 안 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오랜 기간 외교 현장에 몸담았던 직업 외교관답게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거슬리지 않는 외교적 언어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시국이 엄중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전략적 사고가 미흡하다”고도 했다.
“둘 다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슈를 개별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일본과 갈등이 불가피하다면 미국, 중국과 갈등 관리를 한다든지, 미국과 한판 붙겠다면 일본과 갈등을 관리한다든지 하면서 미국, 중국, 일본, 북한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며 개별 이슈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런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미공조가 금이 간 것이 걱정스럽다.
“이번 사태 전에도 미국 내에서는 한미 간 협력 기조가 많이 손상됐다는 의심이 있었다. 한국이 북한인권결의안 공동 제안국에서 빠진다든지, 북한 개성공단과 금강산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미국 정부와 결이 다른 처사였다. 한때 북·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한미 대북정책 공조가 잘 돼간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이 역시 일부 착시 현상이었다. 지난번 판문점 회담에서 우리 대통령은 간단한 3자 정상회담도 못 했고, 회담이 끝난 후 트럼프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간단한 설명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미국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북한의 ‘통미봉남’ 결정판을 봤는데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한미공조가 잘 됐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우리를 배제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북한은 이번 정부에 신세를 많이 졌다. 2015년, 2016년만 해도 북한 외무상이 해외에 간다고 했을 때 받아주는 나라는 쿠바 외에는 거의 없었다. 지금은 장관도 보낼 수 있고 받기도 한다. 외교적 고립이 완전 해소된 거다. 중국까지도 김정은을 초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우리 정부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북·미 정상회담도 우리가 중개 역할을 해 성사된 것 아닌가.
우리 정부는 김정은이 핵 포기 결심을 했다고 국제사회에 보증까지 서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빼고 미국과 직거래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물론 우리로서는 이런 북한의 모습까지 예측했어야 했다.”
며칠 전(11월 20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핵 문제는 협상테이블에서 내려갔다”고 했다.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간 건가.
“본연의 협상 자세인 ‘벼랑 끝 전술’로 다시 나오는 느낌이다. 트럼프 초기만 해도 트럼프의 군사옵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트럼프가 쉽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걸 보고 생각을 다시 한 것 같다. 북한이 대북제재 해제가 절실한 것처럼, 트럼프도 재선을 앞두고 북핵 협상에서 성과를 내는 게 절실하구나 판단해 미국을 흔들어 제대로 압박해보자고 생각한 듯하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북·미 합의가 나온다면 북한에 유리한 반면, 한미에겐 불리한 게 나올 개연성이 크다.”
北 속내는 한미연합훈련 중단
[조영철 기자]
“한미연합훈련을 영구 중단시키는 거다. 이걸 북·미 합의문에 넣으면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된다. 북이 원하는 두 번째가 대북제재 해제니 그 2개를 섞어 스몰딜을 모색할 수 있다. 빅딜로 가려면 비핵화를 넣어야 하는데 의지가 없어 보인다. 종전선언에 흥미가 없다고 말한 건 진심일 거다.”
그는 이어 “한미연합훈련 중단은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와 바로 직결되는 문제라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알다시피 주한미군의 모토는 ‘Fight Tonight’이다. 이건 어느 나라 사령부도 마찬가지다. 지금 땀을 흘리면 나중에 피를 덜 흘린다. 계속 훈련하지 못하면 준비 태세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훈련도 안 하는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결론부터 묻고 싶다. 트럼프가 철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나.
“북한이 스마트하게 딜을 할 경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주한미군을 2만2000명 이하로 줄일 수 없다고 규정한 미국 국방수권법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외교안보 정책은 대통령 권한이다. 미국 국방장관이 ‘철수해도 괜찮다, 한국 정부와 협의가 됐다’고 하면 정치적 논란은 있을지언정 의회는 결정을 막을 수 없다. 다만 국회가 예산권을 갖고 있으므로 감축에 필요한 예산을 못 쓰게 할 수는 있다.”
그가 이 대목에서 말을 끊더니 “좀 빠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이라는 전제를 단 뒤 이렇게 덧붙였다.
“주한미군 감축 이슈가 트럼프 때문에 촉발되긴 했지만 과연 트럼프가 없었다면 안 나왔을 문제일까. 향후 5년 정도 후에는 언제든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어떤 점에서?
“미국이 자국 군인 2만8500명을 한국에 주둔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방어와 한반도 전쟁 재발 방지라는 국지적 목적에 국한돼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낮고, 또 한국 정부가 기를 쓰고 철수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나올 만한 시점이 다가왔다고 본다.
실제로 주한미군은 냉전 후 변화된 범세계적 미군 전진 배치 전략인 동아시아전략구상(EASI)에 따라 단계적 감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북핵 문제가 터지면서 중단된 거다. 미국이 한국, 호주, 태국, 필리핀과 맺고 있는 상호방위조약은 모두 태평양을 지킨다는 지역적 함의가 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만약 한국이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판단될 경우 어떻게 행동할까.”
주한미군이 철수해도 동맹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군이 있는 동맹과 그렇지 않은 동맹의 결속력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군이 떠날 경우 중국과 북한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것도 엄연한 안보 현실이다. 나는 올해 초만 해도 북핵 협상을 하면서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2개의 변수가 더 추가됐다. 방위비 분담 협상과 전작권 전환 과정에서 불거질 우려다. 전작권 전환도 한미 간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어깨동무하면서 주고받아야 하는데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 사령관 등이 시기상조론을 거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억지로 빼앗아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
방위비 분담 협상 이야기를 해보자. 주한미군 감축에 맞서 우리도 따낼 것은 따내자며 역(逆)청구를 하자는 주장이 있다.
“방위비를 대폭 올려주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이라 협상 전술상 빠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역청구 자체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조금씩 양보해야 타결될 텐데, 우리 입장에서도 뭔가 선물이 있어야 계산이 맞지 않겠나.”
미군 있는 동맹과 없는 동맹
트럼프는 5조 원 불러놓고 후려쳐서 2조 원을 받아도 이기는 게임 아닌가.
“돈에 관해서는 굉장히 집요해 보인다. 방위비도 합리적 수준보다 훨씬 더 올려야 만족할 것 같다. 그래서 어려운 협상이다. 타결하려면 한미 협상팀이 한마음이 돼야 한다.”
무슨 뜻인가.
“동맹관계를 흩뜨려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트럼프를 설득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이 최대한 얻어냈다, 합의가 잘됐다’고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에도 노(No)할 것은 노하는 결기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찬성이다. 그러려면 트럼프가 미국 정부 내에서 한미동맹 문제와 관련해 고립되도록 엄청난 외교 노력을 해야 한다. 워싱턴 조야에 한국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애초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그래서 지소미아 사태가 걱정된 거다.”
방위비 협상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최선의 시나리오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은 약간 증액 차원에서 타결하고, 기존 틀을 벗어나는 요구는 내년으로 넘겨 향후 일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협상의 추이를 보는 거다. 지금 미국의 주장은 ‘주둔 비용은 미국이 부담하고 시설과 구역만 한국이 제공한다’는 SOFA(한미행정협정) 제5조를 어기고 있다. 협정 위반에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이라 절차와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내년으로 넘기는 것이 최선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협상 결렬이다. 미국이 우리를 본보기 삼아 필요 이상 엄격하게 징벌적 조치를 가하고 주한미군도 일부 손을 댈 가능성이 있다. 방위비 문제도 전체적인 한미관계 틀을 관리하면서 풀어야지, 갈등 원인이 너무 많은 건 위험하다. 트럼프의 남은 임기 1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한미동맹이 결정적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정책을 펴나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북핵 협상의 돌파구가 나오면 좋지만 거기에만 너무 집착해 동맹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혀서는 절대 안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소미아 사태는 당장 봉합된 듯 보여도 문제는 더 근본적인 것에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인터뷰를 끝낼 즈음 “지금 한국의 주변 상황은 그야말로 ‘가보지 않은 길’에 접어들었다”는 그의 말이 가슴을 더 짓눌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냉전이 끝난 1989년부터 월가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까지 지정학적으로 유례없는 편안한 시기를 보냈다.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하는 지역 질서 속에서 한미동맹의 굳건한 틀을 유지했고,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의 남침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중국도 지금처럼 부상하기 전이었다. ‘지정학적 축복’이라고 불러도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선 느낌이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방위비 분담 협상이나 지소미아 문제가 아니라 향후 5년, 10년 우리 외교안보 정책을 어떻게 펴나갈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과거의 틀을 과감히 깨고 이제까지는 선뜻 내키지 않았던 선택지까지 모두 포함해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지금의 결정이 혹여 미래 선택지의 문을 닫지는 않을지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말이다. 만에 하나 주한미군이 없어진다면 우리 안보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핵무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어렵지만, 안보 상황이 매우 악화됐을 경우까지 상정해 조용히 생각을 시작할 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