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살려내라” 중남미 시위 도미노
지난달 29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이 경찰의 물대포를 철제 펜스로 막아내고 있다. 정부가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안을 철회했음에도 아직까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산티아고=AP 뉴시스
조유라 국제부 기자
하나같이 해결이 어려운 문제들이라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런 혼란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정치학자 제임스 보즈워스는 최근 비즈니스 인사이더 기고문에서 “2020년 더 많은 시위가 더욱 폭력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점쳤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오일 쇼크 이후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경제위기를 겪었던 1980년대에 이어 중남미가 두 번째 ‘잃어버린 10년’을 맞았다”고 가세했다. 과연 중남미 국가들의 시위 도미노를 멈출 해법은 찾기 어려운 것일까.
전문가들은 경제 성장만이 중남미의 극심한 혼란을 해결해줄 열쇠라고 진단하고 있다. 실제 중남미 국가들은 연평균 4.1%의 성장률을 달성했던 2003∼2012년에 민주주의 제도를 안정적으로 운용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남미에서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정부 체제보다 낫다’ ‘자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만족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2008∼2010년에 가장 높았다며 안정적인 경제 성장만이 포퓰리즘 득세와 반정부 시위를 끝낼 해법이 될 것으로 점쳤다.
중남미 국가 대부분이 독립한 19세기 이후에도 스페인 개척자의 후예인 극소수 백인과 메스티소만이 농장, 광산 등 알짜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며 대대손손 부를 독점했다. 그 결과 소수 백인과 나머지 인종의 소득 격차는 점점 더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졌다.
미국 툴레인대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남미 최대 경제대국 브라질에서 하루 소득 1.25달러(약 1475원) 미만으로 살아가는 최극빈층 비율이 백인은 2.8%에 불과하지만 메스티소 등 혼혈(8.8%), 원주민(8.2%), 흑인(7.1%) 등 유색인종은 훨씬 높았다. 하루 소득 2.5달러 미만의 극빈층 비율 역시 백인(8.2%)과 메스티소 등 혼혈(22.1%), 흑인(19.2%), 원주민(18.3%)의 격차가 상당했다.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지니계수가 0.310인 데 비해 2017년 세계은행 기준 온두라스의 지니계수는 0.505에 달한다. 지니계수가 0.5를 넘어가면 언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으로 여겨진다. 칠레(0.466), 베네수엘라(0.469), 볼리비아(0.440) 등도 경계선에 가깝다.
중남미 혼란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원유 천연가스 구리 철광석 등 원자재, 대두 사탕수수 옥수수 등 농산물 등에만 의존하는 ‘천수답 경제’가 꼽힌다. 원자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대외 변수에 극히 취약한 경제구조를 만들었다. 산업화를 이룰 기회와 성장 잠재력을 모조리 갉아먹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00년대 초 ‘세계 7대 부국’으로 불리던 아르헨티나가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대두 옥수수 콩기름 등 농산물 수출에 전체 수출의 약 60%를 의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중국 특수 또한 역설적으로 중남미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굳이 정보기술(IT), 중공업, 금융 등의 산업 다변화, 시설 및 설비 투자, 내수 확대, 인재 양성 등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의 원자재만 수출해도 막대한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왔다. 중남미 최대 경제대국 브라질을 필두로 칠레, 페루 등의 지난해 최대 교역국 역시 중국이었다. 이들은 철광석, 구리, 대두, 사탕수수 등의 원자재와 농산물을 중국에 판매해 손쉬운 외화 벌이를 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중국 경제가 7∼8%대 이상의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2003∼2013년 10년간 중남미 전체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연평균 3.5%씩 늘었다고 진단했다. 세계 원유 매장량 1위 국가인 베네수엘라에선 2015년 국가 전체 수출의 96%를 원유가 차지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성장률이 6%대로 떨어지고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집권 이후 세계 각국에서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한 가운데 미중 무역전쟁까지 겹치자 중남미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중남미 책임자 알베르토 라모스는 FT에 “2014년 후 5년간 중남미 각국의 실질 1인당 GDP는 감소했다”고 진단했다.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원자재 수출로 호황을 누리다 산업화를 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풍부한 자원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원자재 호황 기간에 집권한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1999∼2013년 집권),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2003∼2011년 집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2003∼2007년 집권)과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2007∼2015년 집권) 부부 등 좌파 지도자들은 현금 복지를 대폭 늘리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이들은 원자재 수출로 번 돈을 무상의료, 무상교육, 저가주택 공급 등에 쏟아부었다. 대중교통, 음식, 의약품, 생필품 가격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했다.
특히 ‘볼사 파밀리아’(저소득층 현금 지급) ‘포미 제루’(기아 제로) 정책 등을 내세운 룰라 전 대통령은 한때 무상 복지 정책에 국가 예산의 약 75%를 쏟아부었다. 당시 브라질을 포함해 인근 10개국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섰을 정도로 중남미의 ‘핑크 타이드’(온건 좌파)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이들의 후임자들은 원자재 가격 하락기에 집권했음에도 전임자의 복지 정책을 줄이지 않았다. 핵심 지지 기반인 저소득층의 민심 이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권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룰라의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2011∼2016년 집권)이 두 번째 임기 중 탄핵당한 것도 국가 부채에 대한 회계부정 의혹을 해결하지 못한 탓이다.
즉 ‘원자재 가격 등락에 따른 흥망성쇠’가 고착화한 상황에서 지도자는 원자재 대체 산업을 키우지 않았고, 보조금의 단맛에 길들여진 국민도 구조조정을 비롯한 허리띠 졸라매기를 거부하니 경제난이 더 심각해졌던 셈이다. 룰라 전 대통령, 호세프 전 대통령,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 모랄레스 전 대통령 등이 한결같이 대규모 부패 의혹에 연루됐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룰라 전 대통령은 이로 인해 감옥에 갇혔다가 최근 풀려났고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기약 없는 망명길을 택했다.
이를 반영하듯 올해 중남미에서는 정권 교체도 빈번하다. 좌파가 집권했던 국가는 우파로, 우파가 권력을 잡았던 국가는 다시 좌클릭을 하고 있다. 룰라와 호세프가 13년간 집권했던 브라질에서는 올해 1월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가 됐다. 같은 달 우파 정권이 89년간 집권했던 멕시코에서도 좌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집권했다. 10월 27일 대선을 치른 아르헨티나는 경제 살리기에 실패한 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에게 패했다.
특단의 경제 살리기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빈곤과 사회 혼란의 악순환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지도자가 눈앞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신경 쓰느냐, 단기간의 유혹을 떨치고 경제 체질 개선을 이뤄내느냐에 중남미의 미래가 달린 셈이다.
조유라 국제부 기자 jyr01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