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혹시 누군가 바다에 몰래 버린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매년 20만 개가 넘는 껍데기가 쌓이는 까닭이다. 시간도 일정하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인 11월 초·중순 첫 보름달이 뜰 때다. 이 거대한 산을 만드는 주인공은 거미처럼 다리가 긴 거미게라는 녀석들이다.
평소 깊은 바닷속에서 따로따로 살아가는 녀석들이 어떻게 시간을 맞춰 비교적 얕은 바다 한곳에 모이는지는 모르지만, 모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보통 때는 만나기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해서 짝짓기를 하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대규모 ‘맞선 파티’를 연다고? 그래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같이 모여,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었지만 갑갑했던 갑옷을 한꺼번에 벗어던지고, 속에서 돋아나는 새 갑옷으로 갈아입으니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 축제일까 싶지만, 사실 녀석들에게는 이때만큼 위험한 시간도 없다.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던지고 난 후 새 껍데기가 굳어지기까지 며칠이 걸리는 까닭이다. 이 거대한 만찬 기회를 가오리 같은 포식자들이 가만히 놔둘까? 이게 웬 떡이냐는 듯 축제를 벌인다. 이런 위기를 피하기 위해 거미게들은 가운데로 몰려들고, 그렇게 자기들도 모르게 거대한 산을 만든다.
이 스릴 넘치는 며칠간의 축제 아닌 축제가 끝나면 거미게들은 튼튼한 새 갑옷을 갖춰 입고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긴 하지만 더 성장할 수 없게 하는 갑옷을 벗어던져야 더 클 수 있다는 생존의 지혜를 되새기면서 말이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 적응하는 힘은 그냥 생겨나는 법이 없다. 거미게들이 잘 알고 있듯 지금까지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 걸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새로운 걸 만들어내야 한다. 제아무리 좋은 것도 지금 쥐고 있는 걸 놓지 않으면 잡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연말이다. 새로운 걸 얻기 위해 낡은 걸 버리는 시간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