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사회부 차장
30대 A 씨는 음주 뺑소니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3개월간 술을 끊고 오후 10시까지 귀가하라는 조건으로 보석을 결정했다. 숙제를 잘하고 있는지 매일 동영상을 찍어 올리게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A 씨는 “프로그램 첫 참여자로서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미술놀이를 하는 등 동영상엔 가족의 웃음이 묻어났다. 103일 동안 써내려간 금주일기엔 삶의 변화가 담겼다. A 씨는 “아예 술을 끊겠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믿음직한 남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교도소로 보냈다면 이 같은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을까.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에선 이미 치유법원(Treatment Court), 문제해결법원(Problem-solving Court) 등으로 불리는 제도가 정식 운영되고 있다. 미국에선 1989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에 약물치유법원이 설치된 게 시초다. 이후 재범률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약물 정신건강 가정폭력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됐다. 2014년 말 현재 미국 전역에서 4300여 개의 치유법원이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치유법원에선 판사와 검사, 변호인, 보호관찰관, 사회복지사, 전문상담인, 의사 등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 범행을 불러온 행동이나 습관, 질병을 고치기 위해 맞춤형 처방을 내리고 사법당국의 감독하에 치료와 훈련을 수행한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형사법원으로 넘기고, 숙제를 잘 마치면 처벌을 면하게 해준다.
물론 치유법원이 만능은 아니다. 엄벌이 필요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준다거나 법원이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질병마다 다양한 처방전이 필요하듯, 우리 법원도 형벌 외에 또 다른 보완적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도움이 절실하고 의지가 있는 대상자를 잘 골라낸 뒤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고 제대로 감독, 평가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우선 시범사업을 확대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해 정식 도입을 논의해 볼 만하다.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마치고 재판부는 “이제 작은 씨앗 하나를 뿌린 것”이라고 했다.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우리 법정이 단죄하기만 하는 차가운 법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는 따뜻한 법정의 역할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재영 사회부 차장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