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1936∼2019]한국 경제성장과 함께한 삶
그는 500만 원으로 매출 71조 원의 재계 2위 기업을 일으킨 ‘세계경영’의 선구자였고, 분식회계와 경영비리로 얼룩진 부도덕한 경영인으로 낙인 찍혔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은 청년들의 글로벌 진출을 지원하며 세계경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2017년 대우그룹 5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청년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세상에 흔적을 잘 남긴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웃던 모습이 선합니다.”
한국 경제의 산증인이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년 365일 중 280일을 해외 곳곳을 누비며 ‘세계경영’을 선도했다. 1990년대 중반 대우그룹의 해외 고용인력이 15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다.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지구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가 1989년 펴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경영인이 쓴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100만 부 이상 팔렸다. 동아일보DB
김 전 회장과 대우는 한국의 경제성장 신화 그 자체였다. 자원도 기술도 없던 한국은 차입을 통해 중화학공업에 투자하고 수출로 급속히 성장했다. 대우도 그랬다. 김 전 회장은 서울 충무로에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직원 5명,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만들었다. 업종은 수출. 셔츠와 내의류를 동남아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김 전 회장의 타고난 영업능력으로 대우는 1년 만에 대통령표창을 받을 만큼 성장했다. 수출로 번 돈은 한국기계공업, 옥포조선, 새한자동차 등 제조업 인수합병에 쓰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른 한국은 세계무대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김 전 회장이 1989년 펴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이 같은 대한민국의 자신감을 반영했다. 1990년대 대우는 대한민국의 자신감을 자부심으로 끌어올렸다. ‘세계경영’을 앞세운 김 전 회장은 1년 365일 중 280일을 해외에 체류할 정도로 폴란드, 헝가리, 중국, 베트남 등지로 뻗어나갔다. 대우의 해외 고용인력은 1993년 2만2000명에서 1998년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한국도 대우도 1997년 외환위기 앞에서 맥없이 당했다. 수출을 하려면 수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원-달러 환율이 두 배 가까이 오르자 빚더미에 앉은 꼴이 됐다. 게다가 대우는 차입경영에 의존했다. 금리가 30% 이상 뛰자 속수무책으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그는 1998년 초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으로 ‘500억 달러 무역흑자론’을 내걸었다. 대우그룹 출신인 심준형 김앤장 고문은 “원화가치가 절하됐다는 것은 한국에 수출경쟁력이 생겼다는 의미도 된다. 김 전 회장은 수출을 확대해 외화를 벌어들여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하지만 당시 경제관료들은 한국 기업의 부채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가이드라인에 충실해 김 전 회장과 충돌을 빚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우그룹 전 임원은 “당시 청와대에서 경제수석 등과 큰 소리로 부딪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우자동차만 매각하면 다른 계열사는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여러 차례 “내가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았더라면 경제관료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우 해체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말해왔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이 해체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차입을 통한 과잉 투자가 외환위기 충격을 가져온 주범이라는 시각도 여전히 맞서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대우 회장 시절부터 전문경영인을 자처했다. 회사를 2, 3세에게 승계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여전히 대우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사적으로 ‘오너’의 지위를 남용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1990년 당시 23세이던 장남 선재 씨는 미국에 온 어머니를 공항으로 모시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대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은 가족 일에 회사 직원을 동원하는 일을 멀리 했다. 사적인 일은 철저하게 가족들이 해결하려 했다”고 전했다.
청년들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대우는 199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취업이 어려운 이들의 고향으로 통했다. 직접 면접도 보며 이들의 진취적인 면모를 북돋워 세계경영을 이끄는 주역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2008년 사면 이후 주력한 일도 청년양성 사업이었다. 주로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며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 청년사업가)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운영하는 GYBM은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취업이나 창업을 하려는 청년들을 모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대우그룹 신입사원을 뽑듯 창업의지와 도전정신이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해 교육하는, 이른바 ‘김우중 사관학교’다. 연간 20, 30대 청년 200여 명이 새로 선발돼 동남아 현지에서 교육받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건강이 좀 나아지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았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2년간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청년 교육을 시작했고…. 내가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세상에 흔적을 잘 남긴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도전정신을 주문하기에 앞서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외국에 나가 보면 대한민국 사람처럼 똑똑한 사람이 없다. 청년들을 나무라기 전에 기성세대들이 기회를 만들어 줬는지 생각해야 한다. 교육을 하다 보면 처음에 꿈이 없던 학생들이 3개월만 지나면 스스로 변하는 걸 느낀다. 우리가 봐도 눈빛이 달라진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