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옛 대우맨의 눈물…“김우중 회장, 끝까지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입력 | 2019-12-10 11:48:00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뉴스1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옛 ‘대우맨’ 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직전 구조조정본부 상무였던 김용호 한국GM 사외이사(전 GM대우 재무본부장)는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 “우리나라 주요산업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아직도 활발하게 살아움직이는 여러 사업체를 일군 공이 있다”며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했다”고 평가했다.

김 이사는 김우중 회장을 무서운 책임감과 강인함을 지닌 기업인으로 기억한다. 그는 “첫번째 구조조정 당시인 1998년 말에 김우중 회장이 긴급하게 뇌수술을 했는데, 불과 며칠 만에 사무실에 나타나서 임원들을 놀라게 했다”며 “김우중 회장이 ‘내가 누워있으면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문이 나기 때문에 출근을 했다’라며 구조조정 계획서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고 회상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현장에서 직원들과 소통하는 모습.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 뉴스1


김우중 회장은 사석에선 임직원들에게 늘 다정다감하고, 친밀했다. 김우중 회장이 김 이사의 아내에게 ‘남편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 고생만 시켰다’고 미안함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이사는 소회를 전하며 “(김우중 전 회장을) 끝까지 도와드리고 싶었다”며 복받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김 이사는 구조조정 당시 관련 당국의 태도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우중 회장은 2014년 발간한 저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사재를 포함해 13조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맡기면 10조원을 지원하고 대우차 포함 8개 계열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약속하고선 담보를 내놓자마자 워크아웃으로 넘겨 버리더라”며 “이는 법정관리로 갈 경우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이사는 “김우중 회장은 담보 10조원을 제공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며 “관련 당국이 더 노력했더라면 그룹이 무너지는 상황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대우그룹 출신으로 ‘최장수 홍보실장’ 별칭을 얻은 김종도 전 GM대우(현 한국GM) 전무는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 “한국경제 성장기에 우리 경제가 도약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수출이라는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잔디밭에서 직원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 뉴스1


이어 “외환 위기 때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이 크다”며 “마지막에 병마로 고생하신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김종도 전 전무는 1987년 대우자동차 홍보실로 발령받은 뒤 2009년 GM대우로 이름이 바뀔때까지 22년간 홍보실장을 맡았다. 국내 대기업 임직원 중 ‘홍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장 오래 단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우그룹 홍보팀 대리 출신이었던 최윤권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홍보위원 역시 김 전 회장에 대해 “대부분 대우 직원들이 ‘일만 하시다 가신 분’ ‘한 번도 쉬지 않았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수출 한국의 전사’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김우중 전 회장은 만 30세인 1967년 대우를 설립한 후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 기업을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1990년대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당시 대우의 수출규모는 한국 총 수출액의 약 10%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함께 유동성 위기를 맞은 후 1999년 8월 채권단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에 들어간 뒤 해체됐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