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2> 기술강국 넘어선 세계최초 제품들
1990년 4월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장(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은 당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주름잡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한 번도 일본을 앞선 적이 없었다. 권 부장이 개발팀을 막 꾸리기 시작할 때 히타치가 이미 시제품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완제품을 놓고 ‘분초를 다투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5개월 뒤인 1992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반도체 산업 주도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왔음을 세계에 알린 뉴스였다. 한국이 아시아 변방 국가에서 국내총생산(GDP) 12위 경제대국이 된 바탕에는 이처럼 기업 100년사 곳곳에 포진한 결정적 기술혁신의 순간들이 있었다.
○ 드라마 같은 반도체·엔진 개발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선정한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주요 기술혁신’ 부문 상위 10위에는 64Mb D램 세계 최초 개발(1위)을 포함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과 관련한 장면 3개가 들어있다. 1983년에 있었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도쿄 선언’ 이후 6개월 만에 삼성전자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b(킬로비트) D램을 개발했다. 이후 256kb, 1Mb, 4Mb D램을 거쳐 1990년에 개발된 16Mb D램은 일본 도시바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후 64Mb D램에서 마침내 세계 최초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국내 처음 독자 개발한 자동차 엔진인 현대자동차 알파엔진 개발(1991년·3위)도 반도체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1984년 4월 제너럴모터스(GM)의 선임연구원이던 이현순 전 현대차 부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집요한 설득 끝에 현대차로 출근하면서 시작됐다. 전 직장인 GM의 당시 연구 인력은 약 2만5000명. 첫 출근일에 정 회장은 이 전 부회장에게 5명의 직원을 소개하면서 말했다. “자, 엔진 개발을 시작하게.”
○ 가보지 않은 길에서 이뤄낸 혁신
1992년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제2이동통신의 단일 표준화 기술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을 택한 건 모험이었다. 당시 CDMA는 아무도 쓰지 않는, 퀄컴이라는 작은 미국 벤처기업의 기술일 뿐이었다.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적재적소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단말기도 개발해야 하는데, 어떤 한국 기업도 경험이 없었다.
상용화 작업을 주도한 서정욱 전 SK텔레콤 사장은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을 필요로 할 때가 많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종종 되새겼다”고 했다. 1996년 1월 1일. “일반전화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네요”라는 최초 가입자 정은섭 씨의 소감이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 성공(2위)을 알렸다.
1982년 5월에는 ‘삐익 삐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서울대 연구실과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사이 초당 150글자가 오가는 한국 최초의 인터넷 통신(6위)이 이뤄졌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였다. 당시 연구팀을 이끌었던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는 “가난한 나라의 비가 새는 서울대 연구실에서 이뤄진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대만과 싱가포르 등에서 1992년쯤 인터넷 연구가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프로젝트 시작이 늦었을 경우 한국의 인터넷 개발 역시 1990년 이후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후 삼성전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메모리반도체 강자로 자리 잡았다. 1994년 뒤늦게 뛰어든 낸드플래시도 8년 만에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2002년·9위).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성공 DNA’는 한국을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전자산업 대국으로 올라서게 한 주춧돌이 됐다”고 평가했다.
독자 엔진 개발로 자동차 원천기술을 확보한 현대차는 세계 5대 자동차 제조사로 발돋움했다. 현대차에 기술을 주던 미쓰비시는 2005년부터 현대차에 ‘기술료’를 낸다. CDMA 상용화는 올해 ‘세계 최초 5G 상용화’(5위)로 이어지는 ‘통신강국’의 초석을 닦았다. 남보다 빠른 인터넷 통신 개발은 다음, 네이버 등 포털 서비스와 넥슨 ‘바람의 나라’(1996년 출시·19위) 등 온라인 게임 산업을 키워냈다.
▼ 현대차 엔진개발 확인한 미쓰비시 회장… 日 돌아가 “기술 배우러 한국 갈 판” 호통 ▼
이병철 ‘반도체 도쿄선언’ 내놓자… 日 ‘성공못할 5가지 이유’ 보고서
세계 첫 256Mb D램 개발에 침묵
한국 기업들의 기술 혁신에 대한 해외의 시선은 비웃음에서 경계로, 그리고 탄식으로 변해갔다.
1983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도쿄 선언’을 발표한 직후 비웃은 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했던 미국 인텔만이 아니었다.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기업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을 이유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1992년 64Mb D램 개발을 성공했을 때만 해도 일본은 ‘세계 최초’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도시바도 비슷한 시기에 개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1994년 8월 29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b D램을 개발하자 세계 언론들은 ‘일한 역전’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일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12년 2월 27일. 일본의 ‘마지막 D램 기업’ 엘피다가 도산했다. 다음 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삼성전자는 시황이 악화했을 때 오히려 대규모 투자로 기술력을 높였지만 일본은 가격 하락을 피하려 투자를 줄였다. 결국 한국에 추월당하고 말았다”는 탄식 섞인 보도를 냈다.
고 구보 도미오 전 미쓰비시자동차 회장과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알파엔진 개발을 둘러싸고 나눈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쓰비시자동차는 현대차에 엔진 기술을 제공하고 있었다. 구보 전 회장은 1985년 정 회장에게 “자동차 엔진은 수많은 엔지니어가 해도 될까 말까”라며 만류했다. 정 회장은 듣지 않았다. 2년 후 다시 만난 그는 알파엔진 개발을 총괄하던 이현순 전 부회장을 일컬으며 “그놈 사표를 받아오면 로열티를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면서 경계심을 드러냈다. 현대차가 알파엔진 개발을 사실상 완료했던 1989년 한국을 방문해 이를 확인한 구보 전 회장은 일본으로 귀국해 곧바로 아이치현의 연구소로 가서 퇴근중지 명령을 내렸다. 연구원들을 불러 모아 호통을 치며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 지금처럼 설렁설렁 하다가는 곧 기술 배우러 현대차에 가야 할 거다. 정신 차려라.”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