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의 열쇠 쥔 ‘익산 쌍릉’ 발굴해보니
전북 익산 쌍릉 대왕묘 전경. 지난해 재발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2009년 미륵사지 서쪽 서탑 해체 보수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 명문(“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 논쟁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죠. 그후로 10년 동안의 고고 발견과 이에 덧붙여진 해석들은 새로운 차원의 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출토된 토기.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출토된 치아 일부.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쌍릉 대왕묘의 주인은 누구인가?
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은 전북 익산시 쌍릉(雙陵)의 대왕묘에서 1917년 출토된 유물 중 신라 토기와 여성 인골이 포함됐다고 밝혔습니다. 시신이 여성인 데다 신라 토기가 나왔다는 점에서 선화공주가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죠. 이는 대왕묘 주인이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이라는 역사학계의 통설을 뒤집는 주장이었습니다.
치아 4점은 아래쪽 어금니 2점과 위쪽 송곳니 1점 등으로 서로 중복되지 않으면서 마모 정도가 균일해 한 사람의 치아로 분석됐습니다. 이주헌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치아 4점 모두 목관 안에서 발견됐고 7세기 백제에는 순장 풍속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에 묻힌 사람은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익산 쌍릉 항공사진. 위쪽의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 왕후가 묻힌 소왕묘이고, 아래 큰 무덤은 백제 무왕이 묻힌 대왕묘로 추정된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이와 함께 박물관은 “석실 내 목관 앞에 놓여 있던 토기 1점을 찍은 1917년도 흑백사진을 분석한 결과 7세기 전반의 신라 토기로 분석된다”고 밝혔습니다. 적갈색의 이 토기는 회백색의 편평한 백제 토기와 달리 바닥이 둥글고, 표면을 물레로 마무리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그때까지 백제 왕릉에서 신라 토기가 발견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었죠,
쌍릉 대왕묘에 묻힌 주인공이 무왕이 아니라면 과연 누굴까. 일각에서는 신라 토기가 발견된 것을 들어 선화공주가 묻혀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왕묘가 선화공주의 묘라면 익산 천도를 추진한 무왕은 정작 어디에 묻혔는지가 미스터리였습니다. 더구나 왕비가 왕보다 큰 규모의 봉분을 가진 묘에 묻혔다고 보는 것도 이상했죠.지난해 쌍릉 재발굴 당시 대왕묘 내부. 가장 안쪽에 인골을 담은 나무상자가 놓여 있다. 문화재청 제공
●반전의 드라마
의문이 쌓이는 가운데 지난해 7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 만에 익산 쌍릉이 재발굴된 가운데 대왕릉 석실에서 인골 상자가 발견된 겁니다. 야쓰이 세이치가 1917년 쌍릉을 발굴하면서 수습한 인골을 나무상자에 모아놓고 무덤 문을 닫아버린 것이죠.
그런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결과 문제의 인골이 60대 전후의 남성(키 161¤170.1㎝)으로 밝혀졌습니다. 팔꿈치 뼈의 각도와 발목뼈 크기 등이 남성의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정강뼈에 대해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을 시도한 결과 사망 시점은 620¤659년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성별과 사망시점을 모두 고려할 때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의 연구결과를 180도 뒤집는 내용이었죠.
지난해 공개된 익산 쌍릉 대왕묘 출토 인골과 나무상자. 문화재청 제공
그러나 연이어 이뤄진 쌍릉 소왕묘 발굴에서는 피장자를 추정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왕묘의 피장자는 무왕일 가능성이 높지만, 선화공주의 실존은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증명되지는 못했습니다. 선화공주 실존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인거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익산시민들의 반응입니다. 익산 서동축제의 주인공인 무왕이 대왕묘에 묻히지 않았을 거라는 국립전주박물관 연구결과에 크게 실망했던 익산시민들은 지난해 반전의 재발굴 결과를 크게 반겼다는 후문입니다. 익산시민들의 마음 속에 선화공주의 존재는 여전히 확고해 보입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