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가 잘되려면 입지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도 상권이라고는 없는 골목에 자기 가게를 차린 유명 호텔 출신 요리사(셰프)들이 있다. 이들이 맛집을 일군 바탕에는 호텔 요리를 만든 실력이 기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다고 골목 가게가 유명 맛집이 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실력 외에 뭔가가 더 있었다.
● 어려울 때도 지킨 ‘재료 당일 소진’ 원칙
구리시 일본식 선술집 ‘키노야’의 육승준 대표.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육 대표는 일본과 미국,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2003년 호텔에 취직했다. 호텔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2011년 퇴사 1개월 후 선술집을 차렸다. 가격을 낮추다 보니 호텔처럼 최고의 재료를 쓰긴 어려웠지만 ‘그날 들여온 재료는 그날 소진한다’는 원칙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 버리는 게 더 많았지만 신선한 재료가 최고의 맛을 결정한다는 신념으로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젊은 셰프의 진정성은 그의 음식을 맛본 고객들이 가장 먼저 알아줬다. 가성비가 뛰어난 선술집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키노야는 구리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이 됐다. 단골손님 중에는 멀리 사는 손님도 적지 않다. 만화 ‘식객’을 그린 허영만 화백도 그런 손님 중 하나다. 개업 초기 1명이던 직원은 13명으로 늘었고, 15개였던 메뉴는 현재 100가지가 넘는다. 육 대표는 “단골손님들이 지겨워하실까 봐 메뉴를 늘리다 보니 이렇게 됐다”며 멋쩍어했다.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이던 올해 여름, 키노야는 오히려 평소보다 손님이 많았다고 했다. “단골손님들이 제 걱정에 일부러 와주셨어요. 항상 손님들께 감사할 수밖에 없죠.”
● 시판용 소스를 쓰지않는 ‘장인정신’
‘쌍문동판다쓰’의 최윤호 셰프와 이기수 셰프(왼쪽부터).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두 사람은 같은 호텔 중식당 요리사 출신이다. 최 대표는 롯데호텔월드를 거쳐 2010년 그랜드워커힐호텔 중식당에 입사했다. 밀레니엄힐튼서울에서 일하던 이 대표는 2012년 그랜드워커힐호텔에 합류했다. 호텔급 중식을 동네에서도 팔아보고 싶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메뉴도 일부러 동네 중국집에는 없는 메뉴들로만 구성했습니다.”(이 대표)
두 사람은 중식 중 손이 많이 가는 동파육과 멘보샤를 대표 메뉴로 내걸었다. 각각의 메뉴에는 셰프들의 창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제주도에서는 삼겹살을 먹을 때 고사리를 함께 구워 먹는다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동파육에는 청경채 대신 고사리를 올렸다. 멘보샤에 곁들이는 칠리소스 등 모든 소스는 시판용을 쓰지 않고 직접 만든다. 볶음밥용 밥은 압력밥솥에 짓지 않고 찐밥을 사용한다. 그래야 밥알 하나하나의 식감이 살기 때문이다.
쌍문동판다쓰는 오픈 키친이다. “저희가 고생스럽더라도 중식당은 지저분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최 대표) 중식당은 기름을 많이 쓰기 때문에 화구 위쪽 덕트에 기름때가 쉽게 끼지만 쌍문동판다쓰 주방은 기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동네 중국집보다 왜 비싸냐’고 따지던 손님들도 하나둘씩 두 사람의 숨은 노력을 알아봐줘 개업 3개월 만에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맛집이 됐다. 동네 손님들과는 쌍문동판다쓰가 나온 기사나 방송, 블로그 리뷰를 캡처해서 이들에게 알려주곤 하는 사이가 됐다.
● 손님을 선물처럼 귀히 여기는 태도
일식당 ‘이이요’의 서정훈 대표.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가격은 낮춰도 노력과 정성은 아끼지 않았다. 서 대표는 개업 이후 지금까지 김밥 재료인 계란말이, 박고지(박을 간장에 조린 음식)를 손수 만든다. 박고지는 재료 손질부터 완성까지 1박 2일이 걸린다. 계란말이는 조리법은 쉽지만 팬에 눌어붙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에 조리사 1명을 더 써야 한다. “주변에서 사서 쓰라고 하지만 수제 계란말이는 제 자존심입니다.”
서 대표가 개발한 대표 메뉴 ‘야키돈부리’는 수제 간장소스에 담근 연어, 광어, 관자회와 반숙 계란 노른자를 밥 위에 올리고 토치로 겉만 익혀 내는 덮밥이다. 간장소스는 직접 도미 머리로 낸 육수를 쓰고, 밥 짓는 물은 일반 생수가 아니라 배추와 사과, 배를 끓인 물을 사용한다. 개업 초기부터 ‘혼밥’하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손님이 몰렸다. 16석이던 가게를 지난해 40석으로 확장했지만 지금도 줄을 서야만 맛을 볼 수 있다.
서 대표가 요즘 가장 추천하는 메뉴는 3만5000원짜리 모둠회다. 가장 마진이 낮은 메뉴라면서도 추천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요즘이 연중 횟감이 가장 다양하고 맛있을 때거든요. 손님들은 제 인생의 선물 같은 분들이니 제일 맛있을 때 꼭 드셔봤으면 합니다.”
호텔 출신 셰프들이니 맛을 내는 남다른 비법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음식과 손님에게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지만 그 정성 한 스푼이 손님의 마음을 끈 듯했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