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산부인과 화재 ‘훈련의 힘’ 빛나… 대형참사 잦은 필로티 구조 1층 불 의료진, 연습대로 침착하게 대처… 마취 임신부 우선이송 무사 출산 마지막 환자까지 대피 유도뒤 나와… 병원내 있던 357명 큰 부상 없어
14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한 대형 산부인과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의료진 등이 환자와 신생아를 이불로 감싼 채 대피시키고 있다. 병원에 있던 산모와 신생아 등 357명은 모두 대피했다. 170명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양=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14일 오전 10시경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한 대형 산부인과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신생아실과 산후조리원 등이 들어선 8층 건물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산모 77명과 신생아 75명 등이 건물 안에 있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지만 모두 안전하게 구조됐다. 소방당국은 정기적으로 소방훈련을 한 병원 의료진이 신속하게 대응해 참사를 막았다고 보고 있다.》
14일 오전 10시경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한 대형 산부인과병원. 8층 병원 건물 가운데 4, 5층 외래진료실에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부인과 전문의 김민경 씨도 4층에서 진료하고 있었다. 김 씨의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만 15명.
한 간호사가 급히 문을 열고 진료실에 들어왔다. “불이 났으니 대피해야 합니다.” 4, 5층에 있던 김 씨 등 의료진 4명은 화재 대피 훈련을 떠올리며 비상계단으로 환자들을 안내했다. 훈련 상황으로 생각한 환자들도 있어 끌고 가다시피 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 씨는 마지막까지 남아 미처 대피하지 못한 환자가 있는지 확인했고 간호사로부터 모두 안전하게 대피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제 김 씨도 비상계단으로 대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단에는 연기가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방향을 바꿔 4층 건물 외벽에 설치된 테라스로 이동해 소방대원의 구조를 기다렸다. 그는 “어제 수술을 마친 산모가 있어서 산모와 신생아 모두 걱정됐다. 주기적으로 소방 대피 훈련을 했고 매주 소방 교육을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1층에서 시작된 화재로 순식간에 건물 전체가 연기로 휩싸였다. 다행히도 건물 바로 옆 소방서에서 대원들이 신속히 출동해 26분 만에 진화했다. 2층으로 불이 옮겨붙기 전이었다. 당시 병원에는 산모 77명, 신생아 75명 등 357명이 있었다.
3층 수술실에는 하반신 마취를 한 임신부도 있었다. 전날 자연 분만에 실패해 제왕절개 수술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의료 침대에 임신부를 태운 뒤 가장 먼저 밖으로 대피했다. 이후 병원 구급차를 이용해 약 3.5km 떨어진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에 도착했다. 외래 팀장인 이혜정 간호사는 “일산병원에 도착한 뒤 10여 분 만에 산모가 3.68kg의 건강한 남자아이를 출산했다”며 “산모 남편이 전화로 ‘아기가 건강하게 잘 태어났다. 신속한 대처에 고맙다’고 했다”고 말했다.
경기 일산동부경찰서는 필로티 구조인 1층 주차장 천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부에 노출된 배관의 동파 방지용 열선을 설치한 곳에서 불이 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건물 1층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건물 규모가 작아서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층에는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건물은 모든 경보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선 경보 방식’을 적용해 화재가 발생한 곳에서 가까운 층부터 순차적으로 작동한다. 한꺼번에 대피하려다 더 큰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채용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 “아기들 먼저 ‘캥거루 조끼’에 넣고 신속 탈출” ▼
3층 신생아실 팀장 간호사
14일 화재가 발생한 경기 고양시 산부인과병원의 신생아실 팀장인 김상미 간호사가 응급 상황에서 신생아 2명과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신생아용 대피조끼’를 착용해 보이고 있다. 고양=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14일 화재가 발생한 경기 고양시의 한 산부인과병원 옆에 설치된 화재 대피소. 이곳에서 만난 신생아실 팀장인 김상미 간호사가 긴박했던 대피 순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전 10시경 1층 주차장 인근 천장에서 불이 났을 때 김 간호사는 3층 신생아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 간호사와 함께 간호사 4명이 신생아 28명을 돌봤다. 그때 화재경보기가 울리며 “불이 났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1층에서 발생한 연기가 신생아실 외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을 직감한 김 간호사는 두 달 전 받은 소방 대피 훈련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아기들이 호흡에 어려움이 없도록 천에 물을 묻혀 얼굴을 살짝 덮었다. 신생아실 밖에 비치해 둔 ‘신생아 재난조끼’를 착용하라고 다른 간호사들에게 전달했다.
신생아 재난조끼는 조끼를 입으면 캥거루처럼 왼쪽과 오른쪽에 아기를 1명씩 넣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응급장비다.
미국에서는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JCI)의 재난안전관리 관련 병원 인증을 받으려면 신생아 재난조끼를 의무적으로 비치해야 한다. 국내에선 신생아 재난조끼 비치가 의무 사항이 아니라 일부 대형 병원을 빼면 구비한 곳이 많지 않다. 이 병원은 2년여 전 소방 교육을 받을 당시 ‘캥거루 조끼’ 방식의 장비를 구입했다.
김 간호사는 ‘캥거루 조끼’를 입고 훈련 때처럼 비상용 구조 리프트가 설치된 분만실 방향으로 아기들을 안고 이동했다. 신생아를 구하러 달려온 다른 의료진과 함께 신생아실의 아기들을 모두 무사히 이동시켰다.
고양=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