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하이닉스 품고 ICT 수출 100배로… 1위는 ‘이건희 한국반도체 매입’
“그룹 전체가 망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2010년 말 서울 모처. SK그룹 최고 경영진과 이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참석자가 “덩치가 너무 큰 회사다. 심지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분야”라며 이같이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이사진에게 반도체 제조사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는 의중을 밝히자 우려가 나온 것이다. 당시 이사진, 계열사 경영진 대부분이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반도체의 미래’에 확신이 있었던 최 회장은 사내 세미나를 열고 수차례 투자 시 리스크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이들을 설득해 나갔다.
SK그룹의 하이닉스 인수는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 점프의 순간들’ 중 인수합병(M&A)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한국 기업들은 M&A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가며 퀀텀 점프를 해왔다. 실제로 하이닉스 M&A 이후 SK그룹은 정보통신기술(ICT)분야 매출이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수출도 100배 이상 늘어나 한국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이 밖에 선경(현 SK)그룹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1994년·3위)와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인수(1980년·5위) 등도 M&A 부문 주요 장면으로 꼽혔다. 상위 5건 중 3건이 SK그룹의 M&A인 셈이다. 이들 3개 회사는 SK의 매출과 이익 9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계열사들로 컸다. 재계 관계자는 “저마다 사이클이 다른 이종 사업 분야를 인수해 키우는 것은 SK만의 경영능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주요 M&A 부문 1위는 1974년 12월 6일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현 삼성전자 회장)가 회삿돈이 아닌 사재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산 장면이 꼽혔다. 모토로라 출신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반도체는 국내 최초로 조립에서 나아가 웨이퍼 가공분야로 반도체 산업의 외연을 넓힌 기업이다. 1980년 삼성전자에 흡수합병된 한국반도체는 1983년의 ‘도쿄선언’, 나아가 D램 세계 1위에 오르는 데 산파역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9년 정몽구 회장의 주도로 진행된 현대자동차의 기아차 인수도 4위로 꼽혔다. 현대차는 기아차 인수 이후 2000년 한국 최초의 종합 자동차그룹으로 도약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