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19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당시 송영무 국방부 장관(왼쪽)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하지만 이듬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협정서는 휴지조각이 됐다. 뮌헨협정은 어떤 평화라도 좋다는 ‘평화 맹신주의’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준용된다.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참화는 문서나 선언이 평화를 결코 보장하지 않는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뮌헨의 교훈’은 대한민국이 처한 작금의 안보 상황과도 오버랩된다. 북한이 누더기로 만들어버린 9·19 남북 군사합의서 얘기다. 작년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측 국방수장이 서명한 9·19 합의의 핵심은 육해공 완충구역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북 뒤 대국민 보고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이번 회담에서 남북관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결실은 군사 분야 합의”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여 만에 합의는 존폐 기로에 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평도 포격도발 9주년(11월 23일)에 서해 접경해역의 창린도에서 해안포 사격을 지휘한 것은 합의 파기 통보나 다름없다. 우리 정부의 유감 표명 닷새 만에 초대형 방사포 도발로 되갚은 데서도 그 저의가 드러난다. ‘연말 시한부’를 거론하면서 동창리 발사장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용 액체연료 엔진 시험을 연거푸 강행하면서 고강도 도발 위협을 쏟아내는 것도 더는 합의를 지킬 의사가 없다는 걸로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과도한 저자세로 합의를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김 위원장의 ‘창린도 도발’이나 동창리 엔진 시험을 사전 파악하고도 북한의 발표 뒤에야 공개한 것부터가 그런 모양새로 비친다.
북한을 자극할까 신경 쓰는 기색도 역력하다. 초대형 방사포 도발 직후 군은 북한의 도발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을 내도 모자랄 판에 7줄짜리 ‘대북 입장문’을 발표한 게 전부다. 그 내용도 북한의 합의 위반과 도발에 대한 경고와 사과 요구 없이 유감 표명과 긴장 고조 행위 중단을 촉구하는 데 그쳤다. 동창리 엔진 시험에 대해서도 상황을 주시 중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의 대북 저자세가 해도 너무한다는 성토가 빗발치는 이유다. 일각에선 9·19 군사합의가 북한의 ‘위장 평화’ 놀음에 이용됐다는 비판이 두려워 정부가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이 무시하고, 모멸해도 대북 유화정책의 ‘금과옥조’로 여겼던 9·19 합의만큼은 유지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분위기다. “인내할 수 있는 만큼 인내하겠다”(정경두 국방부 장관), “북한의 단거리미사일 발사는 억지력 강화를 위한 것(김연철 통일부 장관)”이라는 정부 당국자의 발언은 현실과 한참 동떨어지게 들린다.
이런 안이한 인식은 북한에 더 과감한 도발의 빌미를 줘 국민 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제라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떤 도발이라도 실행하는 순간 9·19 합의의 파기 선언을 할 것이고, 모든 후과는 북한이 온전히 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통보해야 한다.
북한이 내팽개친 9·19 합의에 매달려서 그 비위를 맞춰가며 ‘가짜 평화’에 안주하는 것은 안보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