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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Case Study]신기술 투자 번번이 실패… 고민 컸던 중견 제조업체들 ‘신사업 발굴’ 네트워크 만들다

입력 | 2019-12-18 03:00:00

중견기업 연합 벤처투자 플랫폼 ‘선보엔젤’의 탄생과 성장




“왜 지방의 중견 제조업체는 늘 신사업에 실패하는 걸까?”

선보공업의 후계자로 신사업 추진에 골몰하던 최영찬 당시 선보공업 사업기획팀장(현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선보공업은 1986년 최 대표의 부친인 최금식 회장이 창업한 회사로 조선 해양플랜트 분야, 특히 선박 모듈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중견기업이다. 하지만 조선업의 침체를 앞두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절실했다. 수년에 걸쳐 신기술 개발에 수백억 원을 투자해 봤지만 건건이 실패했다. 보다 전문적인 인력으로 투자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사업화를 추진할 필요성이 커졌다. 최 대표가 외부 인재인 오종훈 공동대표, 고덕수 이사를 전격 영입해서 2016년 액셀러레이터 선보엔젤파트너스(이하 선보엔젤)를 스핀오프하게 된 이유이다.

현재 설립 3년 차에 접어든 선보엔젤은 선보공업처럼 혁신이 절실한 부산의 중견기업들이 너도나도 투자에 동참하면서 국내 최초로 중견기업이 연합한 벤처투자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산업의 혁신 수요에 초점을 맞춰 기술 스타트업을 발굴함으로써 중견기업과 스타트업 양쪽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오픈 이노베이션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선보엔젤파트너스의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분석한 동아비즈니스리뷰(DBR) 12월 1일자(286호)의 케이스스터디를 요약해 소개한다.

○ 중견 제조업체 네트워크 결성

선보엔젤의 중견기업 네트워크는 선보공업을 포함해 오토닉스, 기성전선, 태광, 코메론 같은 중견기업의 2, 3세 오너 대표들이 모이는 작은 공부 모임에서 출발했다. 자동차부품, 조선, 페인트 등 업종은 다 달랐지만 이들 기업의 고민은 하나같았다. 전통 산업의 쇠락에 대비한 혁신이 절실했다. 매달 한 번씩 오너들이 스타트업과 투자를 공부하던 모임은 점차 확대돼 기업의 실무진과 스타트업, 투자자들 수십 명이 모이는 네트워크 행사,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로 발전했다. 최영찬 대표는 “중견기업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만나고 밤새 토론하고 개인적인 고민과 남모를 속사정까지 다 공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뢰가 쌓였고, 실제 투자로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선보엔젤은 2017년 7월 중견기업 15개와 산업은행이 투자하는 국내 최초의 중견기업연합펀드 ‘KDB-중견기업 오픈 이노베이션 펀드’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또 선보유니텍, 현대공업 등 8개 기업은 선보엔젤의 주주로까지 참여했다. 부산 지역에서 시작한 라운드 테이블은 현재 광주, 대구 지역의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 중견기업 맞춤형 모델


2018년 9월 부산 선보엔젤 본사에서 열린 라운드 테이블 행사에서 싱가포르 벤처투자사 엑스파라 대표가 동남아 투자 생태계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선보엔젤 제공

선보엔젤이 다른 액셀러레이터와 차별화된 부분은 중견기업의 기술 니즈에 맞춰 기술창업 기업을 발굴해 양쪽이 비즈니스 측면에서 협력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점이다. 선보엔젤은 민간 투자사로는 처음으로 울산과학기술원(UNIST) 캠퍼스에 입주해 원천 기술 발굴에 나섰다. 최 대표를 포함한 선보엔젤 직원들은 캠퍼스 기숙사에 아예 상주하면서 150개 연구실을 일일이 방문하고 사업화가 가능한 기술을 선별해 창업을 독려했다.

선보엔젤이 조광페인트, 박혜성 UNIST 교수와 함께 창업한 조인트벤처(JV) ‘리포마(RIFORMA)’는 선보엔젤이 주도한 중견기업 오픈 이노베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다. 선보엔젤은 조광페인트의 신사업 아이템 선정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박혜성 교수팀과의 협력을 중재하면서 법인 설립까지 이끌어냈다. 오종훈 대표는 “중견기업에서 신사업 담당 직원은 두세 명에 그쳐서 프로젝트를 이끄는 데 한계가 있다. 선보엔젤은 제3자로서 오너의 의도와 실무진의 고충을 모두 이해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효율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다. 중견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대신 담당해 주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재밌는 현상 중 하나는 같은 업종이 아닌, 이종업종 간의 비즈니스 협력도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점이다. 일례로 선보엔젤은 삼진어묵과도 2개의 JV를 설립해 삼진어묵의 글로벌 진출과 새로운 식품 관련 브랜드 유치에 힘을 보탰다. 최 대표는 “각자 영역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들은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고 배우고 싶어 한다. 특히 같은 업종 내 경쟁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더 과감한 협력과 투자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 글로벌 투자 생태계로 확장

선보엔젤은 싱가포르 법인과 베를린 사무소를 설립해 각각 동남아와 유럽 진출의 거점으로 삼고 있다. 국내 기업에 대한 해외 투자를 유치할 뿐 아니라, 국내 중견기업과 해외 스타트업을 연결하는 협업 프로젝트를 확대할 계획이다. 독일의 벤처투자 매니지먼트 회사인 레드스톤과 파트너십을 맺고, 레드스톤의 인공지능(AI) 데이터 플랫폼도 벤치마킹하고 있다. 최근 국가적으로 ‘인더스트리 4.0’을 주창하며 제조업 혁신을 추구하고 있는 독일을 포함해 유럽 시장은 실리콘밸리에 이은 제2의 블루오션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게 선보엔젤의 생각이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진행되던 라운드 테이블 행사를 아예 유럽에서 개최해 중견기업 대표들과 함께 슈나이더 일렉트릭, 노키아 등 글로벌 대기업의 경영진을 직접 면담하고 오픈 이노베이션 사례를 공유했다. 최 대표는 “1차적으로 스타트업이나 벤처 100개, 중견기업 100개의 파트너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되면 중견기업과 스타트업이 종횡으로 협력하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강신형 충남대 경영학부 조교수는 “오픈 이노베이션에 관심은 있으나 단일 규모로 스타트업 투자를 진행하기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선보엔젤 같은 협력적 CVC(기업주도형벤처캐피털)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산=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