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5화> 경남 의령
1919년 3월 14∼16일 사흘 연속 진행된 의령읍 만세시위의 둘째 날 집결지였던 의령향교. 항일 의지가 강했던 의령인들은 비가 내리던 3월 15일 아침 향교 앞에 모여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한 뒤 군청과 경찰서를 향해 행진했다. 의령=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선조수정실록(임진년 6월 1일)은 왜군이 침입해 국토를 유린하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의 활약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경남 의령은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고향이다. 의령에는 곽재우 장군 생가를 비롯해 사당 충익사, 의병박물관, 의병광장 등 의병 관련 시설들이 곳곳에 있다.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날인 4월 22일에는 의병제전과 추모행사가 해마다 열린다.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의령인들은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던 1919년, 일제에 맞서 거세게 일어났다. 의령읍 시위가 3월 14∼16일 사흘간 매일 벌어진 것을 시작으로 부림면(3월 15일), 지정면(3월 16일), 칠곡면(3월 17일), 화정면(3월 20일) 등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됐다. 참가한 연인원이 1만 명에 이르고 50여 명이 옥고를 치렀다.
○ 여동생의 뛰어난 지략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2월 28일 도착한 이 전보의 수신인은 의령읍에 사는 청년 구여순(건국훈장 애국장)이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여동생이 급병에 걸려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한 구여순은 이종 누이동생 이화경과 함께 3월 1일 의령을 떠나 이튿날 경성에 도착했다. 경성 시내는 만세 함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여동생 은득을 우연히 마주쳤다. 아프다던 여동생은 건강해 보였고 시위 군중 속에서 열심히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급병에 걸렸다는 전보는 오빠를 경성 3·1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한 꾀였다. 평소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있던 구여순은 여동생과 함께 한없이 만세를 불렀다.
은득은 그날 밤 오빠에게 경성 상황을 설명한 뒤 의령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자고 제안했다. 구여순은 경성에서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이종 누이에게 부탁해 그의 양말 속에 감추고 세 사람이 함께 고향에 내려왔다. 평범한 한 통의 전보가 의령을 뒤흔들어 놓은 만세시위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의령의 항일독립운동사’)
의령에 도착한 구여순은 평소 자신과 뜻이 통했던 정용식부터 찾았다. 의령읍에서 병원을 개업 중이던 그는 흔쾌히 거사 참여를 약속했다. 최정학 이우식 김봉연 등도 거사에 동참하기로 하고, 정용식의 병원에 모여 거사 방법을 논의했다.
이런 움직임들이 일제 감시망에 포착됐다. 의령에 시위 조짐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부산 일본군 헌병대는 7명을 의령에 보내 조사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령의 독립운동단체인 ‘기미 3·1독립정신보존회’ 권기상 회장은 “일본군이 현지 조사를 하고도 소득 없이 그냥 돌아갔다는 사실은 당시 시위 지도자들이 얼마나 은밀하고 치밀하게 거사를 추진했는지, 주민들이 거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 사흘간 이어진 뜨거운 만세 함성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 아침부터 장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오후 1시경 시장에는 이미 2000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했다. 만세운동을 기획한 이들은 시장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그 아래에 임시 단상을 설치했다. 구여순이 단상에 올라섰다.
구여순의 만세 선창에 시장은 만세 함성으로 진동했다. 보통학교 학생 300여 명과 읍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3000여 명으로 늘었다. 시위대는 의령읍을 한 바퀴 돈 뒤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스스로 해산했다.
이튿날인 3월 15일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지만 의령향교 앞에는 다시 1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남종혁은 “조국의 독립과 2000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자”고 연설했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군청, 경찰서, 보통학교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이날 시위에는 이화경 이원경 최숙자 등이 이끄는 여성단체가 참여했다. 군청 직원 안의인과 정봉균이 시위대 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쳤다.
일제 군경은 시위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 주도자 몇 사람을 체포했다. 체포 소식을 듣고 700여 명이 경찰서로 몰려가 “애국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마산 포병대대 병력이 총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서 10여 명이 추가로 붙잡혔다. 당시 조선경무총장에게 보내진 일제 문서는 “의령 검거자 중에는 굴지의 자산가와 군서기, 면서기가 있다”고 밝혔다.
부림면 신반공원에 세워진 기미3·1독립운동기념비. 의령=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 인근 지역으로 확산된 만세 열기
일제를 놀라게 한 의령읍 만세시위는 인근 지역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구여순과 더불어 의령읍 시위의 핵심 주도자였던 최정학은 시위가 일어나기 전부터 부림면 동원 책임자를 맡아 물밑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부림면 주민 정주성에게 의령읍 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정주성은 다른 동지들과 상의해 의령읍 2차 시위일인 3월 15일 신반리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시위 주도자들은 태극기를 품속에 지니고 시장에 숨어들었다. 많은 군중이 모인 정오경, 시장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를 선창했다. 모인 사람들이 호응하면서 시장이 만세 함성으로 들끓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를 진압했다.
하루 뒤에는 지정면 봉곡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의령읍 1차 시위(3월 14일)에 참가했던 지정면 주민 정호권이 3월 16일 봉곡리 시장에서 벌인 것이다. 주도자들은 이날 오후 1시경 시장에 모인 군중 3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눠 줬다. 정호권이 “파리강화회의(제1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한 승전국들의 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은 승인될 것이니 우리는 힘을 합하여 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자”고 연설했다.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질 때 경찰보 권종수가 나타나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성난 군중은 그에게 몰매를 퍼붓고 그가 입고 있던 제복을 찢어버렸다. 정호권은 3월 18일 지정면과 인접한 창녕군 남지리 시장에 가 조선 독립에 관해 연설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정호권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의령=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