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규제 강화에 사립대학들 한숨 최근 업무추진비 공개 강화 등 조치… 19세기 官 통제받으며 길러내는 꼴” 돈없어 신산업 투자 의욕 꺾이고 글로벌 경쟁력은 추락 또 추락 “융단폭격 규제 대신 핀셋규제를”
박재명 정책사회부 기자
경기 지역 A대학 총장은 최근 각광받는 첨단기술 관련 대학원 설치를 추진하다가 결국 실패했다. 정부가 심사를 통해 특정 학교에만 해당 대학원 설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A대학 총장은 “입학 정원부터 등록금까지 정부가 통제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 먹거리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의지까지 꺾어버리는 것은 문제 아니냐”며 “그 사이 주변국들은 관련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학들이 의욕적으로 나섰던 ‘백가쟁명(百家爭鳴)’식 기술 경쟁이 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경쟁력 하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이 ‘전방위 대학 규제’다. 공대 경쟁력이 강하다는 서울의 B대학 총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국제 경쟁을 하는 대학들의 등록금이 초등학교보다 낮아서야 어떻게 하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대학 재정정책의 핵심인 등록금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11년간 동결 상태다. 일부 대학은 재원 부족으로 학교 기자재 교체를 제대로 못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명목상 등록금 인상은 대학의 자율 권한이지만 모두가 교육부의 ‘동결’ 방침을 10년 넘게 따르고 있다. 등록금을 인상하지 못하는 대학들은 정부가 내놓는 각종 사업에 참여해 ‘사업비’를 받아가야 한다. 만약 한 대학이 사업 참여 대신 등록금 인상에 나선다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격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기획처장은 “10년 넘게 이런 상태다 보니 이제 사립대 전체가 사실상 국공립화된 상태”라고 진단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재단 관계자는 “정부 돈을 안 받고 대학을 운영하겠다고 나서면 정부가 ‘감사’라는 칼을 들고 나온다”며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는 곳은 없는데, 적발되면 ‘비리사학’으로 찍히니 사립대로선 옴짝달짝할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황인성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사무처장은 “사립대 비중이 높은 한국은 사립대의 전반적인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대학 경쟁력도 하락한 것”이라며 “앞으로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수가 줄어드는 상황이라 우리 대학의 경쟁력 하락을 돌이키기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우리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주요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정부의 규제 강화를 꼽고 있다. 통상 독점이거나 사업자가 난립하는 산업 분야에서는 당국의 규제가 시장질서 회복에 도움을 주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선 규제가 강화될수록 오히려 역효과만 커진다는 게 대학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2010년대 이후 각종 사학 규제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며 “정부가 한국 고등교육의 80%를 책임지는 사학을 동반자가 아니라 적으로 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립대에 다니는 대학생 수는 2013년 전체 학생의 76.4%에서 2017년 77.7%까지 늘어났다.
정부가 대학을 대상으로 한 규제는 크게 입시정책, 재정정책, 감사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모든 분야에서 최근 정부의 ‘입김’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게 사립대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부 교육 규제에 대한 반발은 사립대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교육부가 18일 ‘사학 혁신 추진 방안’을 발표한 직후 주요 사립대는 “사학 운영자 및 구성원을 ‘적폐’로 낙인찍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사학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1000만 원 이상 횡령·배임을 저지른 사학 법인 임원은 바로 퇴출하고, 업무추진비 공개 대상도 대학 총장에서 법인 이사장 및 상임이사로 확대하는 것 등을 내년에 시행하기로 했다. 한 사립대 관계자는 “21세기 학생을, 20세기 대학이, 19세기 관(官)의 통제를 받으며 길러내는 꼴”이라고 토로했다.
여기에 정부는 올해 들어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와 사립대 등 사학을 압박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사학이 느끼는 정부의 ‘규제 강도’가 더욱 큰 것도 이런 일련의 정책들 때문이다. 자사고와 외국어고, 국제고는 2025년 정부의 일괄 폐지 방침으로 존폐 기로에 섰고, 사립대는 16개 대학 첫 종합감사와 학종 실태 조사 등을 정부로부터 받고 있다. 사립대 관계자들은 “민주화 이전 시기가 대학의 시국선언이나 학과 신설 등에 대한 정부 통제가 오히려 덜했다”며 “유독 대학과 관련한 규제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고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교육계에서는 “정부가 다른 모든 산업 분야에서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을 강조하고 있는데 교육에서는 왜 그런 이야기가 없는지 의문”이란 문제 제기가 적지 않다. 네거티브 규제는 법령으로 금지하는 것만 제외하고, 모두 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 방식이다. 이낙연 국무총리 등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최근 잇따라 강조하는 규제 전환 방식이기도 하다.
한양대 정책실장을 지낸 배영찬 교수(화학공학)는 “이사회 이사 선임 방법까지 국가가 모두 정하는 지금 상황은 지나친 대학 자율성 침해”라며 “정부가 규정을 정하고 이를 어기는 대학만 폐교를 각오할 정도로 엄하게 처벌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견에 대해서는 상당수 대학 관계자들도 공감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 기획처 관계자는 “지금은 모든 사립대가 ‘사학’의 이름으로 함께 매도당하는 상황”이라며 “문제가 생기면 규제하되, 문제가 없는 부분에 대해선 전향적으로 규제를 풀어줘야 국제 수준의 대학이 나온다”고 말했다.
현재와 같은 정부의 대학 규제 방식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153개 사립대 총장들의 협의체인 사립대총장협의회는 지난달 총회를 열고 “2020학년도부터 법정 범위 내에서 자율적으로 등록금을 올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교육부가 “(등록금 인상 대학에 대해) 적립금 감사를 할 것”이라며 강경 방침을 내비쳤지만, 사립대총장협의회는 오히려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도 등록금 인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시모집이 끝나는 내년 초에 등록금 인상 강행에 나서는 대학이 나올지 주목된다.
교육 분야 비리를 엄단하고, 사학 투명성을 높이자는 정부 정책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정부가 사학의 공공성 강화를 명분으로 추진하는 정책들이 사학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그 결과로 ‘미래세대 육성과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교육 본연의 역할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사학 정책의 접근 방향을 지금과 같은 ‘융단폭격’식 제재 대신에 문제가 있는 곳을 정밀 수술하는 ‘핀셋’ 대책으로 바꾸는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재명 정책사회부 기자 jm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