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개봉 다큐 영화 ‘파바로티’ 다큐 정석에 충실해 의외성 없지만 예술가의 삶 자체로도 흡인력 숱한 명사와 교류-개인사 흥미진진… 대중 관심 끈 일부 논란은 비껴가
파바로티의 삶은 스스로의 선택 외 흥행사와 매니저들에 의해 ‘기획된’ 면이 컸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손수건도 리사이틀을 어색해하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기호였다. 오드(AUD) 제공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는 푸치니 오페라의 탁월한 해석자였지만, 영상으로 재구성한 그의 삶이 푸치니의 인생을 떠올리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키가 컸고 친절했다. 우수(憂愁)와 댄디함이 앞섰던 푸치니와 비만한 몸에 양팔을 벌리며 천진하게 웃는 파바로티는 많이 달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여성들로 가득한 대가족 속에서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뒤 세계인을 매혹하는 성악예술의 거장이 됐다.
여성에 대한 사랑에서 삶과 예술의 자극을 구한 점도 닮았다. 사람들은 파바로티가 오페라 스타로서의 삶을 함께한 부인과, 비서 출신인 두 번째 부인만을 알고 있었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밝히면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비서’도 사실은 비서가 아니었다.
1 호세 카레라스(왼쪽), 플라시도 도밍고(오른쪽)와 함께한 스리 테너 콘서트. 2 파바로티는 만년에 ‘절친’이 된 다이애나빈(오른쪽)의 영향으로 자선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3 또 만년의 사랑 니콜레타에게도 영향을 받아 록그룹 U2의 리더 보노(오른쪽)와 함께 ‘파바로티와 친구들’ 등 자선공연을 펼쳤다. 오드(AUD) 제공
1990년대 이후 오페라 무대를 멀리하며 록밴드 U2의 보노를 비롯한 대중음악가들과 함께하는 무대에 오른 건 오랜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불러왔다. 만년 자선사업에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감독은 파바로티 주변인들의 입장을 충실히 전한다. 다이애나 빈을 비롯한 명사들과의 교류 및 만년의 새 사랑 니콜레타의 관심사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것이라고.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사실은 이랬을 것이다. 파바로티의 선택은 나름대로 영리했다. ‘당시의 파바로티’가 ‘과거의 파바로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활동의 범위를 확장했던 것이다. 거의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는 햇살과 같이 따사롭고 찬란한 빛깔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제어하는 힘의 쇠퇴, 특히 호흡이 짧아져 반주자와 동료 성악가들이 템포를 맞춰 줘야만 하는 일은 1990년 첫 스리 테너 콘서트부터 명백했다.
파바로티는 현대에 출현한 모든 테너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악기’, 그의 발성기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그 악기를 연주하는 솜씨도 경탄의 대상이었다. ‘라이벌’이었던 도밍고는 “파바로티는 입만 벌리면 모든 소리를 다 냈다”고 영화에서 증언한다. 그러나 그 악기를 관리하는 솜씨는 파바로티가 도밍고보다 하수였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오페라 무대의 단짝이었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은 점은 의아하다. 손녀의 출생과 함께 ‘옛 가족’과 ‘새 가족’이 화해한 점은 강조하지만, 파바로티가 사망한 후 유산 분배를 둘러싼 충돌은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들이 해소됐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나온 것일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