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6> ‘품질’로 승부해온 현대차그룹
1999년 3월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기아자동차 임원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정 회장 자택 마당으로 카니발이 소환된 이유는 잦은 결함 때문이었다. 1998년 출시된 후 ‘제2의 봉고차’로 불리며 반응이 뜨거웠던 미니밴 카니발은 각종 결함으로 리콜 조치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정 회장은 서울 여의도 기아차 본사의 품질회의실로 임원들을 다시 불렀다. 분필을 손에 쥔 그는 슬라이드 도어 위쪽 창문, 시트 밑, 문틈에 일일이 동그라미를 쳐가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기아차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정 회장의 품질회의는 이 무렵부터 시작됐다.
품질경영의 토대가 만들어진 결정적 계기는 1998년 9월 미국 시장에 도입한 ‘10년간 10만 마일 무상보증’ 조치였다. 당시 포드와 GM은 3년 3만6000마일, 도요타는 5년 6만 마일을 보장했다.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두고 단기적 시장점유율을 늘리려는 마케팅 무리수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 조치는 미국 소비자의 현대차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승부수로 작용했다. 정 회장은 이후 일주일에 두 차례씩 실무담당자로부터 개선 사항을 직접 보고받았다. 실제 품질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고 평가받은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정 회장의 품질경영 씨앗이 하루아침에 꽃피지는 못했다. 예기치 않은 결함이나 문제가 발견돼 번번이 발목을 잡자 정 회장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2002년 기아차 오피러스 수출 차량을 손수 시험주행하다 미세한 소음을 발견하자 선적을 40일가량 올스톱 시키고 “엔진의 잡소리를 잡으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런 부단한 노력 끝에 미국 소비자조사업체인 ‘JD파워’ 신차품질조사(일반브랜드 부문)에서 1998년 꼴찌였던 현대차는 2006년 사상 첫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가 8년 만에 품질을 기록적으로 개선한 것은 JD파워가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엑셀, 쏘나타, 그랜저, 제네시스…. 새로운 모델이 하나씩 출시될 때마다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로서의 밑그림을 하나씩 구체화해 나갔다. 1981년 비밀리에 떨어진 ‘X카 프로젝트’는 그 출발이었다. 1000여 명으로 구성된 개발팀은 3년 만에 시제품을 생산했고 수출에 대비해 캐나다에서 혹한 테스트까지 마쳤다. 이렇게 완성된 X카가 바로 ‘포니엑셀’이다. 1986년 1월 엑셀이란 이름으로 미국에 처음 진출한 후 포니엑셀은 첫해에만 16만8000여 대가 팔렸다. 미국에서도 신기록이었다.
포니엑셀의 성공으로 세계 곳곳에서 한국차가 누비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됐다. 태국의 시내버스가 현대차 브랜드로 채워졌고 이탈리아 로마에선 피아트를 제치고 엑셀이 순찰차로 활용됐다. 하지만 1990년대 미국의 경기침체와 원화가치 상승 등이 겹치며 가격경쟁력을 잃은 한국차는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 싸구려 차라는 이미지도 굳어져 갔다. 이 무렵 구원투수로 등장한 게 1999년 미국에 진출한 EF쏘나타였다. 1999년 2월 동아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구입하던 차가 면모를 일신했다’며 미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발 앞선 비전을 제시해 오던 정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글로벌 톱5 메이커’라는 목표를 처음 밝혔다. 1999년 당시 현대·기아차가 213만 대 생산으로 세계 11위를 했으니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현대차는 2010년 포드를 제치고 실제로 글로벌 판매량 5위에 올랐다.
이어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선보인 2015년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는 글로벌 브랜드 경쟁력을 높인 또 한 번의 파격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제네시스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 말은 현대차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화 시절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정신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 (현대차에는) 더 많은 자산과 기반이 있습니다. 도전해야 변화하고, 바뀌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