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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히트작이 사라진다… 저성장시대 소비 징후[광화문에서/염희진]

입력 | 2019-12-27 03:00:00


염희진 산업2부 차장

올 한 해를 정리하며 유통·소비재 분야에서 어떤 상품이 ‘메가히트’를 쳤는지 되짚어봤다. 여기서 메가히트란 전 세대에 회자되고 품절대란을 일으키거나 유사 상품이 쏟아질 만큼 인기를 끈 것을 말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하이트진로의 ‘테라’와 ‘진로이즈백’을 꼽았다. 출시 6개월 만에 4억5000만 병이 팔린 테라는 맥주공장 가동률이 2배 이상 높아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두꺼비가 상징인 원조 브랜드 ‘진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진로이즈백’도 소주시장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빼고는 메가히트작이 보이지 않는다. 음료·제과시장은 연매출 1000억 원 이상을 거두는 히트작의 대(代)가 끊긴 지 오래다. 음료시장에선 2009년 코카콜라의 ‘비타민워터 글라소’ 이후 10년간 히트상품이 없었다. 제과업계는 가장 최근 히트작으로 2014년 품절대란을 일으킨 ‘허니버터칩’을 꼽았다.

패션업계는 2017년 롯데백화점의 평창 겨울올림픽 기념 롱패딩 이후 뚜렷한 유행 아이템이 없다. 달팽이크림, 마스크팩 등을 쏟아냈던 화장품업계 히트작은 지난해부터 실종됐다. 유통업계는 대기업을 긴장시켰던 ‘마켓컬리’ 같은 혁신적 시도가 없었던 한 해였다. 그 대신 대형마트들은 초저가 경쟁에 돌입하거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점포를 정리하는 ‘마른 수건 짜기’에 돌입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저성장시대에 나타나는 징후라고 진단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소비자들은 가격에 민감해진다. 동시에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걸맞게 소비자의 취향은 다양해지고 눈높이가 높아졌다. 오랫동안 저성장을 연구한 김현철 서울대 교수는 “저성장 초반엔 소비자들이 최저가를 찾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걸 학습하게 되면 싸면서도 좋은 것 혹은 비싸도 니즈에 맞는 제품을 선호하며 시장이 세분화된다”며 이를 10명이 제각각 다른 소비 성향을 가진 ‘10인 10색 소비’로 정의했다.

성장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우려는 기업을 잔뜩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이 ‘쿠션’을 만들기 위해 10년간 연구를 하고, CJ제일제당이 설비 구축에만 100억 원을 투자하며 ‘햇반’을 만들었던 사례는 성장이 계속되던 때나 가능하던 이야기다. 쏟아부은 연구개발비만큼 대규모 매출이 보장되지 않는 저성장시대에는 안전한 성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복고를 새롭게 해석한 ‘뉴트로’ 제품이 쏟아지는 이유도 한 번 검증된 옛 히트상품의 변주를 통해 안정적인 성과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저성장시대를 살아가는 기업에는 과거와는 다른 성공 전략이 필요하다. 초저가 전략, 비용 절감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저성장기를 미리 경험했던 나라에서 보듯이 현상 유지에 머물렀던 기업은 도태됐고 혁신한 기업들은 성공했다. ‘마른 수건 계속 짜는 기업’으로 유명했던 도요타가 저성장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용절감이 아닌 고객 관리를 통해 획기적인 주문생산 방식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다양해지고 세분화된 소비자의 수요를 읽어내 신속하게 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반영하는 게 성공 조건이자 기업의 능력이 된 시대다. 메가히트작은 이런 시대 흐름을 읽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않는 기업에서 나올 것이다.

염희진 산업2부 차장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