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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의 슈퍼파워, 염치(廉恥)[이승재의 무비홀릭]

입력 | 2019-12-27 03:00:00


‘겨울왕국2’의 엘사는 물의 정령에 맞서 싸우기보단 그를 동반자로 만든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지난 칼럼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엔 ‘겨울왕국2’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럼 ‘겨울왕국2’의 엘사는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영웅과 뭐가 다르냐고요? 엘사는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을 슈퍼파워로 승화시킨다는 점이 절묘합니다. 엘사가 갖는 힘의 근원은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이 아닌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에 있단 얘기죠.

저는 엘사처럼 남 탓을 안 하는 영웅은 난생처음 봅니다. 조석으로 4만 원짜리 비타민 주사를 맞는지 피부도 백옥 같은 엘사는, 콧대 높아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속 터질 만큼 제 탓만 합니다. 손에 닿는 모든 대상을 얼려버리는 남다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라면 통상 ‘아, 나 스스로가 너무 멋져. 초능력을 발휘해 아렌델 왕국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태평성대를 이뤄야지!’ 하고 결심할 터인데, 엘사는 마법의 세계인 아토할란으로 훌쩍 떠나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힘을 축복보다는 저주로 여긴단 말이죠. 자신의 특별한 능력이 도리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고독의 세계로 도망쳐 버리는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처럼, 엘사는 동생인 안나에게 그 귀한 통치권을 넘긴 뒤 ‘어어∼어’ 하고 들려오는 식겁할 귀신 소리를 좇아 자신이 속해야 할 세계를 향해 표표히 몸을 던집니다.

만약 엘사가 ‘엘자지루’ 같은 이름을 가진 왕자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요? 남성이라면 소유와 지배의 욕망으로 점철된 ‘나 아니면 안 돼’의 이데올로기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엘자지루는 ‘음하하하’ 하며 왕국을 손안에 쥐고 비스마르크 뺨치는 철권통치를 하면서 궁예의 ‘관심법’을 동원해 정적들을 모조리 얼려 죽여 버렸겠지요. 자신의 얼음에너지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겠다며 지구 반대편의 ‘우라질’ 왕국까지 위협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인 남동생 ‘안자지라’에게도 역모의 누명을 씌워 능지처참해 발본색원했겠지요.

자기능력을 과소평가하다 못해 스스로를 탓하고 학대하며 소멸시키려는 엘사의 복장 터지는 사고체계는 ‘남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여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한다’는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의 최근 연구 결과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생물학과 남녀 학생 25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똑같은 학점을 받고도 남학생들은 ‘난 지능이 높아’라며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반면 여학생은 ‘난 남보다 덜 똑똑해’라며 자기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짙었다고 하지요. 남보단 자신에게 더 엄밀한 여성의 뇌구조를 엘사도 고스란히 지닌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겨울왕국2엔 놀랍게도 적(敵)이란 개념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보통 영웅들은 위대하고 성스러운 여정을 방해하는 적들을 ‘깨부수지’ 않습니까? 롤플레잉게임처럼 한 단계 한 단계 더 강력한 괴수들을 죽여 가며 계단식 성장을 이루지요. 그런데 엘사는 아토할란으로 가는 위험천만한 길을 막아서는 상대들을 쳐부수기보다는 자기 안으로 흡수하고 하나가 됩니다. 바다에서 자신을 공격해 오는 말(馬) 형상의 ‘물의 정령’ 나크만 보아도 그렇지요. 엘사는 나크에 맞서기보단 나크를 길들여 등에 올라탄 뒤 아토할란을 향한 여정의 동반자로 삼잖아요? 죽자고 달려드는 도마뱀 모양의 ‘불의 정령’ 브루니에겐 차가운 눈 방석을 만들어줌으로써 그 뜨거움을 상쇄하도록 해 안식을 선물해주지요. 상대를 적이 아닌 친구로 보는 관계지향적인 여성의 특징이 엘사의 초능력에 깃들어 있는 부분이지요. 결국 엘사는 자신이 물, 불, 땅, 바람의 정령에 이은 마지막 ‘제5원소’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을 완성시키기로 결심합니다. ‘맞서 싸워(against) 나의 세계를 지킨다’는 투쟁적 태도가 아니라 ‘함께함으로써(with) 세상을 완성한다’는 통합적 애티튜드로 무장한 여성 리더가 엘사였던 것이지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로 일갈되는 영화 ‘왕의 남자’ 속 이심전심이 비로소 ‘겨울왕국2’에서 빛나는 게 아닐지요?

그래서 ‘물에는 기억이 있다(Water has memory)’는 이 영화 속 대사는 의미심장합니다. 물은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를 뜻하는 메타포. 결국 엘사는 태어남의 근원인 기억의 강물 속으로 초개와 같이 뛰어든 뒤 자기 할아버지가 이 모든 반목과 전쟁의 원인 제공자였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엘사는 일본의 아베처럼 과거를 외면하기보단 솔직히 인정하고 바로잡으려 하고, 결자해지의 이런 태도는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가 절묘한 균형점을 찾도록 해주지요.

유튜브로 영화 보면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능력만이 초능력이 아닙니다. 세상만사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용기, 즉 ‘염치(廉恥)’야말로 지상 최대의 슈퍼파워입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