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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왕진 의사[횡설수설/이진구]

입력 | 2019-12-28 03:00:00


“수유리 어딘가에 버스를 내려 외풍이 싸늘한 추운 방에서 쇠약해진 환자를 보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나… 의사를 보는 것만도 그에게는 위안이 됐을 것이다.”(유석희 중앙대 의대 명예교수의 회상)

▷의료 시스템이 부족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두툼한 가방을 들고 골목을 오가던 왕진 의사는 흔한 풍경이었다. 모든 게 열악할 때라 청진기, 체온계, 응급약과 주사기가 전부였지만 의사가 환자에게 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왕진 거부로 환자에게 피해를 준 의사에 대해 ‘의도(醫道)를 망각했다’는 기사까지 나던 시절이었다. 왕진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취해서 왕진을 못 간 의사 남편 대신 아내가 가서 주사를 놓다가 경찰에 걸린 일도 있었다.

▷보건복지부가 어제부터 ‘왕진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왕진은 수가에 진료시간과 교통비 등이 포함되지 않은 데다, 의료 서비스가 확충되면서 점차 줄어 일부에서만 제공했는데 고령화시대가 되면서 다시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중증 거동 불편 환자들이 사설 구급차(특수)를 이용해 병원에 가려면 편도 7만5000원에 10km가 넘으면 추가 요금이 붙는다. 치료비는 고사하고 교통비조차 버거운 수준이다. 반면 왕진은 1형의 경우 의사 교통비와 진료비 등을 모두 포함해 11만5000원인데 여기서 자기부담금은 30%인 3만4500원이다.

▷왕진은 환자 편의는 물론이고 환자와 의사 간의 인간적 소통이 이뤄진다는 장점도 있다. 경기 포천시에서 호스피스 전문병원을 운영하는 정극규 원장은 일주일에 이틀은 중증 환자들을 위해 가정 방문 진료를 한다. 종합병원 외과 의사였다가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뒤 말기 암 등 중증 환자 곁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해주는 의사로 재출발했다. 환자가 움직이면 이동, 대기, 진료 등 6시간 이상 걸릴 일이 그가 방문하면 30분 정도로 충분하다고 한다.

▷먼저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일본은 왕진이 한 해 1000만 건에 이른다. 주간, 야간, 심야, 휴일별로 왕진 수가가 세분되고 방문 진료 전문병원까지 있다. 우리는 동네 의원만 시범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의료계 반발로 348곳에 불과하다. 국내 의원이 3만 곳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적다. 대한의사협회는 낮은 수가를 이유로 반대하면서 회원들에게 불참 공문까지 보냈다. 의료 행위도 손해 보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인술(仁術)인데 환자보다 수익을 먼저 따지는 현실은 마음이 불편하다. 스스로 병원에 가기 힘든 사람은 누가 찾아와 손만 잡아줘도 큰 힘을 얻는다. 그 손이 의사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