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까talk]낯선 사람과 소통 ‘일회성 모임’ 인기
이날 처음 만난 직장인들이 호스트의 집에 모여 ‘번아웃 증후군’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이들은 “기존 인간관계에 한계를 느낀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색다른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이주호 씨 제공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직장인 5명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의 집 프로젝트’를 위해 모였다. ‘호스트(집주인)’는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한 뒤 참석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았다. 여느 연말 송년회, 친교모임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 이날 처음 본 사이라는 점. 준비물은 대화할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다.
‘소통 불능의 시대’라는 요즘, 의외로 처음 보는 사람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공감할 의지와 말할 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다. 이들은 친구나 지인,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와 달리 관계에 강제성이 없는 ‘느슨한 관계’가 오히려 소통에 장점이 된다고 본다.
‘남의 집 프로젝트’는 이런 시류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날 참석자가 다 도착하자 호스트는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라며 포문을 열었다. 모임의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일에 몰두하다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증후군’.
호스트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 테스트’ 종이를 건넸고, 참석자들은 ‘일이 재미가 없다’ ‘점점 냉소적으로 변한다’ 등 17개 문항의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겼다. 일정 점수를 넘겨 심각한 수치를 보인 참석자도 나왔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생활이 구분이 안 됐다” “퇴사를 자주 하고 싶다”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이어졌다.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늘었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등으로 구성된 참석자 조합은 얼핏 보기엔 어색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고, 내 고민 역시 위로받기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 보는 이에게 속내를 터놓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며 놀라워했다.
이런 모임은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하게 이뤄지지만 대체로 연속적 모임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강제성이 전혀 없어 부담감이 적은 게 장점. 독서, 공예 등 특정 취미를 테마로 한 모임과는 달리 ‘대화’ 자체가 목적이다. 김성용 ‘남의 집 프로젝트’ 대표는 “현대인들은 모르는 이들과도 시시콜콜한 주제건 깊이 있는 테마건 얘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수요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결국엔 깔때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 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퇴사 뒤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에선 새로운 도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 처음 만난 이들은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응원해줘 힘을 얻었다”고 했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는 “나이,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볼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 뼈 있는 조언이나 생각지 못한 혜안을 들을 때도 많다”고 했다.
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