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 <1> 내년 100세 맞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우리 시대의 현자(賢者)로 불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사진)의 고언이다.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의 첫 필자인 김 교수는 무엇보다 정부가 아닌 국민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미래 100년을 위해 시급한 현안으로 경제 문제를 꼽았다. “전문가들은 제4차 산업사회를 말하기도 하고, 인공지능의 개발은 노동시장과 생산 수단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경제 문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김 교수는 사회 지도층의 철저한 반성도 촉구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고정관념이나 이기집단적 가치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선진국가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며 “50년 후 자신들의 모습을 예상해 보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 법망에서 벗어날 수는 있으니까’라는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계를 떠나야 한다. 이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국민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릴레이 기고]<1> 내년 100세 맞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경제다. 정치보다 더 절박한 과제다. 전문가들은 제4차 산업사회를 말하기도 하고 인공지능의 개발은 노동시장과 생산 수단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변혁에 뒤따르는 문제는 산업사회의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된다는 경고다.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일자리 문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우리 정부의 능력과 경제정책으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경제 문제를 국제간의 경쟁과 협력에서 해결지어야 한다. 국내의 사소한 문제나 노사 간의 투쟁을 갖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경제는 정체와 후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자리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교육을 받은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많이 갖고 있다. 이들을 아시아와 세계 여러 지역으로 보내는 길을 정부가 열어 주어야 한다. 어학과 기술이 전제가 된다. 젊은 세대들은 10개의 일자리를 위해 100인이 줄서서 기다리거나 취업시험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개척해 가는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 할 때다. 이를 위해 정부 주도형 경제가 아닌 기업 주도의 시장경제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 일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까지도 이미 경제는 시장경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문제 해결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방향을 찾는다면 어려운 과제도 아니다. 성공한 선진국가의 선례를 찾아 따르면 된다.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는 물론이고 호주, 일본도 같은 길을 택하고 있다. 민주주의 신봉 국가들이다. 민주주의는 휴머니즘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데는 확실한 방향이 있다. 교육과 문화를 위해서는 자유가 보장되는 선의의 경쟁이 필수적이다. 정신적 성장과 창조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사립교육의 가능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교육의 다양성이 다원사회를 가능케 하며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 경제 정책은 법적인 평등보다 양극화를 억제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평등을 위한 평등은 창의적 성장을 제약할 뿐이다. 정치는 정의 가치의 구현이다. 인권 존중을 위한 최고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 더 많은 국민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윤리적 질서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선한 가치와 질서를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인들의 자질이다. 정치를 통해 이득을 노리는 사람들은 민주정치의 적이다. 정권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공산국가와 신생 국가의 생태가 그러했다. 정부와 정권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나는 미국 워싱턴 부근의 마운트버넌에 있는 조지 워싱턴의 농장을 가보았다. 그의 무덤도 있는 곳이다. 워싱턴은 퇴임 후 농장에 돌아와서는 손님을 대할 때마다 “나를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대통령은 백악관에 계십니다. 나는 농민으로 있다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다시 농민으로 돌아왔습니다. 농민이라고 부르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메리카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고 농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런 애국자가 정치 지도자이기를 바란다.
정치인들이 고정관념이나 이기집단적 가치관을 포기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면 선진국가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50년 후의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예상해 보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 법망에서 벗어날 수는 있으니까’라는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치계를 떠나야 한다. 이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국민도 책임을 져야 한다.
한 가지만 더 추가하기로 하자. 만일 세종대왕 때 창제한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문화권을 따르고 있을까. 편지나 글도 어떤 문자로 썼을지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국어교과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우리글과 말을 말살시키려고 했다. 일본문화권에 흡수해 버리면 우리 민족은 영구히 일본화가 되기 때문이다.
공산국가나 히틀러의 독재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사상의 원천인 인문학을 억제하거나 폐기했다. 한때 중국에서는 마르크스 사상과 마오쩌둥 어록이 인문학을 대신했을 정도였다. 나도 중국에 가면 유명한 대학들 주변의 서점에 들러 중국 학생들이 어떤 책을 읽는가, 살펴보곤 했다. 읽을 책이 없었다. 인문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세계적 공통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류가 수용할 수 있는 사회과학은 전통을 이어온 인문학 국가들의 업적으로 태어났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이 그 대표적 예가 된다. 그리스는 그 전통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문학으로 그쳤고, 중국은 인문학의 근대화를 상실했기 때문에 일본이 중국학 연구에 앞서는 후진성을 자초했다. 인문학의 단절이 정신문화의 종식을 초래한 것이다. 인문학이 모든 정신사의 주역을 담당했다. 인문학이 사회과학을 탄생시켰고 사회과학 뒤에 자연과학이 열매를 맺은 것이 세계 정신사의 순서였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 분야는 여러 중견 국가에 의해 육성되었기 때문에 문화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기다리는 염원은 우리 문화의 세계적인 진출을 위해서다. 지금까지 경제보다 정치의 후진성을 지적했으나 우리 정부의 교육과 문화정책은 더 뒤지고 있다. 문화 전반의 결실은 정상적이고 창조적인 교육의 유산으로 주어진다. 지금과 같은 교육정책으로는 인문학까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이념 교육은 교육의 정도(正道)가 아니다. 특히 정치적 이념 교육은 역사적 성과보다는 범악(犯惡·악을 저지르다)의 결과를 초래한다. 교육은 인간됨의 본성과 가능성을 통해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유구한 역사의 성장을 짧은 기간에 속하는 이념으로 묶어 놓아서는 안 된다. 한 세기쯤 후에는 한글과 우리의 예술이 세계무대의 위상까지 진입할 수 있는 교육의 선진화가 우선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의무를 위한 전환점에 처해 있다. 지도층 사람들의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택과 노력의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는 법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정체나 단절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선택한 것은 5년으로 끝날 수 있으나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반세기 동안은 지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