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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첫 국산화… 산업화 길뚫고 新성장 개척

입력 | 2019-12-31 03:00:00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11> 전후 폐허서 기간산업 키운 한화




‘노벨의 후예들’.

1959년 6월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과 당시 한국화약의 인천화약공장 작업반을 가리켜 주요 일간지는 이같이 표현했다. 전후 폐허가 된 인천화약공장의 복구를 위해 설계도를 확보하러 일본 전역을 돌고, 간신히 모은 화학 분야 인재들과 함께 연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의 꿈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1941년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한 청년 김종희가 처음으로 화약과 인연을 맺은 지 18년 만이었다.


○ 사업보국 길 걸은 ‘다이너마이트 김’

한화그룹의 모태는 인류 문명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발명품인 화약을 만드는 ㈜한화다. 화학의 핵심 용처는 군사에서 토목 분야로 옮겨지며 곳곳에 쓰여 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총포화약류취체령’으로 한반도 내에서 화약 생산을 금지하다 만주사변의 발발로 화약 수요가 폭증한 후에야 허가할 정도로 철저히 통제했다. 김 회장은 스무 살이 되던 해 5촌 당숙의 소개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 조선화약공판에서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해 화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광복 후 ‘조국 화약계의 등대수’가 되기로 결심한 김 회장은 미군정, 6·25전쟁 와중에도 화약공판을 사수하며 화약산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인정받아 전쟁 중에 미8군 병참기지사령부 화학관리 용역을 따냈고, 이듬해인 1952년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를 설립했다.

1959년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한 한국화약(한화)은 1960년대 들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중책을 맡았다. 산지가 많은 국토에 도로를 놓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수적이었다. 김 회장은 이후 1965년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해 석유화학 산업으로 다각화를 시작했다. 이후 1980년 한국화성공업을 포함한 5개사가 통합된 한국프라스틱공업의 최종 인수를 통해 종합화학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현재의 한화케미칼과 한화첨단소재의 전신이다. 또 1964년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해 국가 경제의 최대 과제였던 기계공업을 육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1969년에는 경인에너지를 설립해 에너지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 회장은 늘 임직원들에게 “화약처럼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화의 기업사를 연구한 이광주 단국대 명예교수는 “김종희 한화 창업 회장의 삶은 사업보국의 정신으로 국가 기간산업에 전념한 기업가”라고 평가했다.


○ M&A 승부사, 제2의 창업

1981년 김 회장의 별세로 29세의 나이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자리에 올랐다. 김 회장은 곧바로 취임 이듬해에 한양화학(다우케미칼과 한국종합화학의 합작사)과 한국다우케미칼 인수에 나섰다. 당시 한양화학은 매년 수십억 원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김 회장은 유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울 기회라고 판단해 “젊은 경영자가 오기를 부린다”는 사내의 비난을 무릅쓰고 인수했다. 그리고 1년 만에 회사를 흑자 전환시켰다. 이는 한화그룹이 에너지와 석유화학 분야로 뻗어나가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회장의 ‘인수합병(M&A) 승부사’ 기질은 이후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1985년 부실기업으로 판정된 정아그룹을 인수하며 현 한화호텔앤드리조트로 발전시켰다. 바로 이듬해에는 한양유통을 인수해 한화갤러리아로 키워냈다.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인수는 금융사업을 한화의 주력 사업 부문으로 전환시킨 한화 M&A사의 백미로 꼽힌다.

당시 대한생명은 대주주의 전횡, 부실대출로 누적 결손금만 2조2906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 사무실을 직접 찾아 입찰 제안서를 제출할 정도로 의지가 확고했다. 한화 관계자는 “부실 금융사 인수로 그룹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김 회장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회’라며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이후 김 회장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아 정상화된 대한생명은 한화에 인수된 지 8년 만에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됐다. 한화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떠오른 태양광 사업 역시 2010년 솔라펀파워홀딩스와 2012년 큐셀(현 한화큐셀) 인수 등 시의 적절한 M&A로 성장세하고 있다. 2014년 삼성의 방산 및 석유화학 4개사 인수는 한국 기업사에 남을 ‘빅딜’로 기록됐다.


○ 구조조정 성공으로 이끈 ‘의리’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린 혹독한 시련이었다.” 김 회장은 1997년부터 2년간 이어진 구조조정을 뒷날 이렇게 표현했다. 외환위기 속에서 수족 같은 계열사들을 매각할 때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는다. 10여 개의 사업 부문을 매각하면서 한 번도 잡음을 내지 않아서다. 김 회장은 불가피하게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게 “지난 인연을 잊지 말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는 위로를 잊지 않았다. 또 나중에 사내에 추가 인력이 필요하면 옛 한화 임직원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화의 기업문화인 ‘의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2대 연속 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은 부친과 김 회장의 대를 이은 사회공헌으로 꼽힌다. 김종희 창업 회장은 “그럴듯한 대학을 설립하는 게 낫지 않냐”는 주위의 조언에 ‘고등학교야말로 나라의 초석이 될 일꾼을 길러내는 진정한 육영사업’이라며 1976년 천안북일고를 설립했다. 20여 년 뒤인 1997년 김승연 회장은 천안북일여고를 설립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