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부모의 감정 다스리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인터넷 검색창에 ‘욱해서’ ‘화나서’라는 단어를 치면 수많은 사건이 검색된다. ‘요즘 세상 무섭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은 우리가 피해자가 될 수 있어서만이 아니다.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에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건 사고에 나오는 그 ‘욱’과 우리가 어제 저녁 아이에게 한 ‘욱’은 조금은 달라 보인다. 하지만 계속 욱하는 상태로 산다면, 그 욱과 내 욱이 언제까지나 다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욱은 ‘조절해야겠다’는 마음을 일부러 먹지 않으면, 계속하게 되어 있다. 점점 더 강도도 세진다. 욱이라는 것의 특성이 그렇다. 만날 욱하다가 좋은 말로 하면 뭔가 뜨뜻미지근하다. “야!”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 강력하게 감정을 표현해야 상대가 좀 기가 죽는 것 같고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군가를 힘으로 눌렀을 때 느끼는 묘한 쾌감이 있다. 욱할 때 우리 몸에서 나오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은 대부분 누군가와 싸울 때 분비되는 것들이다. 맹수를 만났을 때,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때, 나의 온몸이 싸울 태세를 한다. 욱할 때도 같은 상태다. 그래서 상대방이 내 욱하는 모습에 움츠러드는 것을 보면 ‘이겼다’는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쾌감에 익숙해지면 별것 아닌 일에도 감정을 강하게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바로 욱에 중독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누구나 욱하기 때문에, 누구나 욱하고 있어서 욱하는 것을 묘(?)하게 이해한다. 욱은 감정 조절이 미숙한 것이고, 심하면 반드시 치료받아야 하는 분노조절장애이다. 그런데 이것이 보편적인 감정인 양 이상스러운 이해(?)를 서로 주고받고, 욱한 자신에게도 쉽게 면죄부를 준다. 아이에게 욱하고 “어제도 나 뚜껑 열렸잖아. 아, 글쎄 ○○이가…”라고 고백하면, 상대는 “다 그렇지 뭐. 애들이 좀 말을 안 들어야지” 한다. 그러면 마음이 좀 안심되기까지 한다.
부모가 욱해서 소리를 지르면 아이는 조용해진다. 그런데 부모를 존경해서도, 부모의 생각이 옳아서도 아니다. 어릴 때는 무서워서 몸도 마음도 그 순간 꽁꽁 얼어서 꼼짝 못 하는 것이고, 좀 자라면 ‘아, 또 난리네’ 하고 부모를 피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든, 그 감정을 남에게 표현할 때는 그것이 과하게 부정적이라면 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누구도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권리는 없다.
새해에는 ‘욱하지 말아야겠다’는 목표를 하나 더 추가했으면 좋겠다. 욱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안전한 세상에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 도덕적 가치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첫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때릴 권리는 없다. 설사 부모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둘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격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권리는 없다. 셋째,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다. 그것이 나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했다면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물어줘야 한다.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 회사에서 무척 시달린 아빠가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으로 들어선다. 아이들이 “아빠!” 하고 달려든다. 갑자기 피로감이 확 몰려온다. 그렇다고 “저리 가. 아빠 피곤해”라고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된다. 내가 지금 피곤하고,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주면 내가 더 피곤해지므로 나의 손해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아이가 아빠와 함께할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직장생활이 힘든 것은 내 숙제다. 내 숙제로 아이의 권리나 다른 사람의 안전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