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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종은 일제에 끌려가고, 총 맞으며 지킨 우리 혼”[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입력 | 2019-12-31 03:00:00

5대 보신각 관리소장 신철민 씨




제야의 종 행사에서는 원래 1468년 제작된 보신각종(보물 2호)을 쳤으나 균열로 타종이 어려워지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1985년 광복절부터 새 종으로 대체했다. 원광식 주종장(77·국가무형문화재 112호)이 에밀레종(국보 29호)을 모델로 만들었는데, 그는 상원사 동종, 에밀레종을 복원한 국내 범종 제작의 1인자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이진구 논설위원

《매년 섣달 그믐날 자정이면 서울 보신각(普信閣)에서는 ‘제야(除夜)의 종’ 행사가 열린다. 1953년부터 열렸으니 올해로 66년째다. 그 오랜 세월 뒤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종지기’를 천직으로 여기고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었다. 5대 종지기인 신철민 보신각 관리소장(45·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주무관)은 “2대 종지기였던 스승님의 조부는 일제강점기 보신각을 지키다 일본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

―보신각 관리소장이면 공무원인데 대를 이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스승님의 증조부가 구한말 보신각을 관리했는데 그 뒤를 조부, 부친이 이어왔다. 스승님의 조부는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보신각 옆에 공중화장실을 짓자 곡괭이로 때려 부숴 잡혀가고, 스승의 모친은 6·25전쟁 때 보신각을 지키다 다리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나라가 없던 시절부터 집안에서 가업처럼 이어오다 스승님이 1988년 보신각을 관리하는 서울시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되면서 정식 공무원이 됐다. 스승님은 4대, 나는 5대다.”

―당신은 같은 집안이 아니지 않나.

“보신각종은 원래 3·1절, 광복절, 제야의 종 이렇게 세 번만 쳤다. 그러다 2006년 시민에게도 개방하자는 취지에서 처음으로 상설 타종 행사를 열었는데 당시 내가 타종 행사 대행업체의 연출팀장이었다. 출연자들에게 종 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배웠는데 그게 인연이 됐다.” (스승에게 아들이 없었나.) “있었는데 사업을 하느라 이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스승님이 병환도 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를 눈여겨봤던 것 같다. 그때는 일 때문에 타종법을 배운 거였는데 가혹할 정도로 엄했다. 문화재 재연 행사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내가 왜 이걸 배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뒤를 잇는다는 건 생각도 안 했다. 그러던 중 스승님이 입원했는데 거의 매일 병원을 다니며 간병하던 어느 날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신 팀장이 내 뒤를 꼭 이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전에도 두어 번 말씀하신 적은 있었지만 완곡하게 고사했는데 그날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든지 할 테니 빨리 나으시라고 했는데 그 다음 날 돌아가셨다.”

※신 소장의 스승은 고 조진호 씨로 2006년 12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80세.

―유언이 된 셈인가.

“그때 스승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듯 홀가분하고 평안한 모습이셨다. 아프신 중에도 뒤를 이을 사람을 남기지 않고 가는 게 내내 마음이 쓰이셨는지…. 그래서 그렇게 엄하게 가르치신 것 같기도 하고….” (스승이 임명권은 없었을 텐데.) “물론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2007년 초 채용 공고가 났을 때 시험 보고 들어왔다. 서류 전형과 면접을 봤는데, 당시에 26명인가 지원했던 것 같다. 스승님이 돌아가셔서 대신 그 아드님이 추천서를 써주긴 했지만….” (떨어지면 어쩔 뻔했나.) “그러게…. 나도 무슨 생각으로 지원했는지…. 뭔가에 씐 것도 같았고…. 하하하.”

―면접에서는 뭘 묻던가.

“보신각을 어떻게 꾸려 나갈 건지에 대해…. 나름대로 스승님 밑에서 배우며 느낀 걸 토대로 5개년씩 20년 계획을 준비했다. 제대로 된 관리를 위한 관리동과 경비 시스템 설치, 보신각 활성화 프로그램 같은 거다.” (그 전까지는 경비시스템이 없었나.) “감시 카메라 한 대 없이 사람이 순찰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스승님은 사모님이랑 보신각 옆 작은 사무실에서 거의 집에도 안 가고 지켰다. 지금 있는 이 관리동은 2012년에 지은 것이다.” (경비업체를 쓰는 게 더 낫지 않나?) “공교롭게도 내가 들어온 바로 그 이듬해 숭례문이 불탔다. 숭례문은 당시 사설 경비업체의 무인 경보 시스템을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초기 화재 진압이 늦어져 불이 더 커졌다. 이후에는 숭례문도 옆에 관리동을 짓고 사람이 상주하며 지키고 있다.”

※2008년 2월 10일 저녁 국보 1호 숭례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범인 채종기(81)는 징역 10년형을 받고 지난해 2월 만기 출소했다.

―보신각이 시내에 있다 보니 관리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신철민 소장이 보신각 감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자러 들어오는 노숙인들도 있고, 취객도 많은데… 크고 작은 볼일을 보러 들어오기도 한다.” (주변에 널린 게 화장실인데 왜 보신각에서….) “하하하. 종각역 화장실 공사할 때는 노숙인들 화장실이 여기였다. 경내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는데 그 아래서….” (혼자서 다 지킬 수는 없지 않나.) “카메라가 7대 있는데 관리동에서 모니터를 통해 감시한다. 보신각 담과 보신각에는 적외선 센서가 사방으로 쳐 있어 침입하면 경보가 울린다. 한 시간 간격으로 순찰도 돌고. 스승님은 혼자 했지만 지금은 반장님이라고 부르는 문화재 경비 인력이 도와주고 있다.” (늘 보신각에 상주하나.) “과에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본청과 보신각을 수시로 다닌다. 그래서 오전 6시쯤 본청에 들렀다가 보신각에 온다. 전에는 오전 8시쯤 출근했는데 이동이 많아지면서 보신각을 비우는 시간이 느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 그래서 출근 시간을 당겼다.” (우리 사장님이 이걸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하하하.”

―주변에 집회시위가 많은데 위험한 적은 없었나.

“2008년 여름에 광우병 사태 때 군중이 보신각 경내로 넘어 들어왔다. 종을 치며 주장을 알리겠다고…. 종이 있는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함께 있는 반장님과 필사적으로 막았는데, 몸싸움이 나고 얼굴을 맞고 난리도 아니었다. 의경들도 옷 벗겨지고 헬멧 뺏기고 그랬으니까. 끝끝내 막기는 했는데 만약에 뚫려서 당목(종 망치)이라도 잡아당겨 떨어졌으면 큰일 날 뻔했다. 200kg이나 되니….”

―제야의 종 행사는 어떻게 준비하나.

“8월 말부터 계획을 수립하는데 대행업체 공모, 업체 선정 위원회 구성, 타종 인사 선정 및 섭외, 유관기관 협의 등을 거치려면 넉 달 정도 걸린다. 10, 11월에 타종 후보 선정과 섭외를 하는데 홈페이지에서 시민 추천도 받고, 유관기관에도 부탁한다. 나도 틈틈이 찾아보고…. 한 100명 정도가 추려지면 과에서 회의를 해 압축하고 섭외를 한다. 올해 가장 많이 추천된 인사가 ‘펭수’였는데 섭외가 만만치 않았다. 내가 직접 EBS를 찾아가 부탁했는데 내년 3월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류현진 선수도 물망에 있었는데 두 번이나 에이전트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안 됐다. 작년에는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께 요청을 드렸는데 자신이 행사에 참석하려면 다른 후배를 근무시켜야 해서 곤란하다고 고사했다. 그래서 백도 좀 썼다. 도와달라고…. 하하하.”

※제야의 종 타종 인원은 통상 16명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소 늘기도 한다. 서울시장, 시의회 의장, 시교육감, 서울경찰청장, 종로구청장은 고정이다. 류현진 선수는 인터뷰(25일) 뒤인 29일 참석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이 때문에 올해는 17명으로 한 명이 늘었다.

―타종 방법이 따로 있나? 당목 무게 때문에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행사를 치르고 나면 일주일간은 어깨를 잘 못쓸 정도다. 4명씩 4개 조가 9·8·8·8회(총 33회)를 치는데 당목이 무거워 내가 뒤에서 조정을 해야 한다. 5번 흔들고 6번째 치기 때문에 모두 198번을 치는데, 힘주지 말라고 당부를 해도 막상 치는 순간에 대개 힘을 준다. 그 힘까지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몇 배로 힘이 든다. 박찬호 선수가 쳤을 때는 자칫하면 34번이 될 뻔했다.” (박찬호 선수가 왜?) “다른 분과 달리 의욕이 넘쳐서 온힘을 다해 쳤다. 힘이 센 데다 약간 흥분했던 것 같기도 했고. 워낙 세게 치다 보니 반동으로 한 번 더 맞을 뻔했던 거지… 하하하.”

※박찬호 선수는 2013년 8·15 행사에 참여했다.

―종을 치며 대개 소원을 빌 텐데 효과가 좀 있나.

“스토리를 만드느라 국내에서 세 번째로 소원을 잘 들어주는 종이라고 해설은 하지만…. 올해 수능 100일 합격 기원 타종을 하고 간 수험생은 서울대와 KAIST에 붙었다고 연락이 오더라. 수험생들에게는 소원을 적은 종이를 모아서 수능 날까지 보신각에 보관한다. 매일 소원지가 종소리를 듣게. 타종 후 한 달 후쯤 임신이 됐다고 알려온 난임 부부도 있고, 교사 임용고시에 붙은 사람도 있긴 하다. 일반인들은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정오에 칠 수 있는데 인기가 많아 내년 1월은 이미 거의 다 찼을 정도다.” (매일 종을 치는 당신은 정작 무슨 소원을 비나.) “음… 우리나라 잘되게 해달라고?” (지금 정치판을 보면 그건 안 이뤄질 것 같은데….) “하하하, 가족의 안녕도 빌고, 특히 스승님의 손자가 내 뒤를 이어 6대 종지기가 되게 해달라고 빈다.”

※제야의 종 행사는 자정이 좀 지나면 끝나지만 그는 뒷정리가 끝나는 오전 8, 9시쯤에야 퇴근한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전쟁의 참화를 겪던 시절에도 보신각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스승처럼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다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 타종의 맨 앞줄에 서야 할 사람들이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