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세계인의 일상을 바꾼 K열풍
28일 유튜브 본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브루노의 서점 ‘반스앤드노블’에 있는 음악잡지 코너. 지미 헨드릭스, 오아시스 등 록 스타들을 다룬 잡지보다 앞에 한국 그룹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를 다룬 잡지를 배치했다. 샌브루노=황규락 특파원 rocku@donga.com
미국 사회에서 한때 특이한 아이들이 좋아하는 서브컬처로 통하던 한류, 한국 문화가 주류 문화에 전방위로 파고들고 있다. 지난해 5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른 뒤 K팝 그룹들이 차트 최상위권에 포진하더니 올해는 영화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 최대 흥행을 거두며 골든글로브 주요 부문 후보에 올랐다. 방탄소년단, 몬스타엑스, NCT 127, 슈퍼엠, 봉준호 감독 등은 미국 인기 TV 토크쇼를 통해 세계 가정의 안방에 스며들었다. 현지의 10, 20대 사이에는 가방과 액세서리부터 의류까지 실질적인 유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0년, 20년 전 한중일 3국과 동남아시아에 불던 돌풍이 세계 대중문화의 심장부로 옮아갔다. 돌풍의 이름은 K, 곧 한류다.
○ 레이디 가가, ‘아바타’ 수출국 → 방탄소년단, ‘기생충’ 수입국
미국 CNN은 2010년부터 올해까지 10년간의 영어권 대중문화 경향을 돌아보는 29일 기사를 이런 내용으로 시작했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미국에서 만든 음악, 영화, TV 프로그램이 여전히 주류이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한국과 일본 대중문화 수출 영향의 꾸준한 증가다.”
CNN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의 역동적 뮤직비디오를 언급했다. 이뿐 아니라 드루 배리모어, 에마 스톤 등이 사용하는 한국산 미용 제품이 ‘보그’ ‘엘르’ 등의 패션지에 꾸준히 등장하는 상황을 들었다. 아시아인이 할리우드 영화, 영국 팝에 열광하던 과거가 역전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주목할 것은 미국인의 한국 콘텐츠 소비 증가가 질적으로도 주류 쪽으로 핸들을 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미국 비즈니스센터가 7월부터 9월까지 미국 거주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27일 발표한 ‘K-콘텐츠 미국 시장 소비자 동향조사’에 따르면 K팝과 한국 드라마를 즐기는 방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 K팝을 듣는 플랫폼 가운데 ‘스포티파이’의 비율이 급증했다. 지난해 K팝을 스포티파이와 애플뮤직으로 들은 비율은 각각 전체의 10.1%, 8.4%에 그쳤지만 올해는 27.4%와 12.7%로 크게 늘었다. 스포티파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음원 서비스다. 한국의 ‘멜론’ 이상으로 높은 점유율을 기록한다. 시각적 호기심에 유튜브로 가볍게 소비하던 K팝이 일상의 음악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다.
캘리포니아주 샌머테이오 ‘반스앤드노블’의 케이팝 코너에 있는 방탄소년단 관련 상품들. 샌머테이오=황규락 특파원 rocku@donga.com
한류는 이제 현지인의 미(美)의 기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케이팝 아이돌과 K-뷰티에 대한 관심이 맞물려서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국내에서 1990년대 ‘꽃미남’ 열풍이 일었듯 해외에서는 케이팝을 통해 ‘대안적 남성성’의 매력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앨터스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부촌이다. 이곳에 위치한 사립학교 ‘월도프 스쿨’은 구글과 페이스북의 임직원 자녀가 재학생의 70%에 달한다. 이곳에서 최근 방탄소년단 로고가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학생들은 열 명 중 한 명에 이를 정도다. “요즘 가장 힙한 그룹”이라는 것이 학생들이 밝히는 이유다.
올해 서울 종로 제야의 종 타종식에 EBS 인기 캐릭터 펭수가 출연한다는 소식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비슷한 미국의 제야 행사에는 방탄소년단이 나온다. ‘빅 애플’ 뉴욕의 심장부인 타임스스퀘어에서 열리는 ‘딕 클라크스 뉴 이어스 로킹 이브 위드 라이언 시크레스트’다.
1월 1일 0시, 새해를 알리는 ‘볼 드롭’ 장면이 생중계되는 이 프로그램은 매년 최대 2500만 명의 미국인이 지켜보는 행사다. 올해는 포스트 멀론, 샘 헌트 등 현지 인기 가수들과 방탄소년단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영어권에서 2020년 새해맞이는 단순한 1년 맞이가 아니다. 데케이드(decade)라 부르는 ‘새 10년’, 즉 2020년대의 시작이다. 다음 10년간, 한류의 흐름을 예견하는 상징적인 징후들이 연말연시, 전 세계에서 잇따라 출현하고 있다.
임희윤 imi@donga.com·샌브루노·샌머테이오=황규락 특파원 rock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