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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에 위로 받고, K문화 즐기며 친구 만들어요”

입력 | 2019-12-31 03:00:00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한류팬 100명에게 물어본 K열풍




한국 전통문화 전파에 앞장서는 외국인들. [1][6] 나이지리아의 ‘장구 전도사’ 이시오마 윌리엄스 씨가 지도한 학생들이 사물놀이와 장구 공연을 하고 있다. [2] 2015년부터 한국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대만의 펑페이징 씨. [3] 드라마 ‘대장금’으로 한국 문화를 접한 대만의 양지아시안 씨(오른쪽에 서 두 번째)와 친구들. [4]가야금을 연주하는 양지아시안 씨. [5] 지난달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외국인국악아카데미 수료 공연. 본인 제공

《콜롬비아의 약학자 루이사 마리아 가르시아 씨는 요즘 ‘동의보감’을 공부하고 있다. 8년 전 유튜브로 본 한국 드라마가 그의 운명을 바꿨기 때문이다. 한류가 세계인을 바꾸고 있다. 취향을 넘어 삶까지 송두리째. 내년 4월 1일 창간 100주년을 맞는 동아일보가 세종학당 등에 의뢰해 세계 60개국 한류 팬 100명에게 물었다. ‘K’로 대표되는 한류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느냐고.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됐다”가 그들의 대답이었다.》

“한국에 가서 직접 매실차를 맛보고 싶어요. 소화 효능을 몸소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커피 산지로 유명한 남미의 콜롬비아에 사는 루이사 마리아 가르시아 씨(23·여)는 요즘 ‘동의보감’ 연구에 빠졌다. 보고타국립대에서 약학을 전공한 그는 최근 한국인 친구로부터 허준의 ‘동의보감’을 추천받았다. 한국어를 공부한 지 4년. 한국어로 쓴 동의보감 속 기(氣)의 원리나 민간요법들까지 독학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배움의 즐거움은 무엇보다 크다고 한다. “소화에 좋다”며 매실의 효능을 줄줄이 읊던 그는 “약재료부터 콜롬비아와 한국은 천지 차이다. ‘동의보감’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라고 말했다.

가르시아 씨는 8년 전, 유튜브로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2009년)를 보며 한국을 알게 됐다. 방탄소년단(BTS) 등 케이팝으로 관심을 넓힌 그는 이제 졸업 후 한국의 약학대학원에 진학하는 게 목표다.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도서관에 들러 ‘동의보감’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가르시아 씨는 “양국 의학에 대한 비교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전했다.

한류가 변하고 있다. 더 이상 한류는 드라마와 뮤직비디오를 보는 수동적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BTS의 음악, 영화 ‘기생충’ 등 한국의 대표 콘텐츠들이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면에서 한류는 세계인의 일상, 나아가 이들의 삶의 궤적까지 뒤흔들고 있다. 내년 4월 1일 창간 100주년을 맞는 본보는 해외문화홍보원, 세종학당을 통해 전 세계 60개국 100명의 한류 팬을 접촉했다. 이들은 ‘한류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등에 대한 질문에 △위안과 자존감을 주는 메시지 △동서양 문화가 섞여 낯설면서 익숙한 느낌 등이 자신의 삶을 바꾼 한류의 주요 매력 요소라고 꼽았다.

○ K팝에서 K전통까지

한국 문화가 가진 ‘익숙한 독특함’으로 인해 외국인 중에는 한국인보다 더 전통문화 전파에 앞장서는 이들이 많다. 사물놀이는 아프리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케냐의 단짝 친구 하다사 은지오키 씨(22·여)와 윈프레드 나고하 씨(22·여)는 세종학당에서 사물놀이 동아리를 이끌고 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선물받았다는 은지오키 씨는 “어릴 때 듣던 아프리카 전통악기들과 소리, 리듬이 유사해 쉽게 빠져들었다”고 설명했다.

나이지리아인 이시오마 윌리엄스 씨(49)는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2013년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는다. 그는 “장구의 소리를 듣자마자 독특함에 매료됐다. 유사한 타악기가 많은 나이지리아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고 회상했다.

장구의 매력을 알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나이지리아로 돌아간 윌리엄스 씨는 2014년부터 하루 3시간씩 유튜브로 사물놀이 공연을 보며 장구를 독학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무엇보다 장구는 온라인으로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장구 수업을 진행할 비용 문제도 컸다. 그가 전통 악기들을 조합해 직접 장구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한국문화원의 도움을 받아 2016년 라고스에 첫 장구 강좌를 연 그는 현재까지 100여 명의 ‘장구 유망주’를 배출했다. 최근에는 나이지리아 전통 드럼을 연주하는 그룹과 협업 공연도 펼쳤다.

이들은 사물놀이 공연을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소극적인 성격도 장구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변해 갔다. 나이로비 곳곳을 누비며 사물놀이를 알렸다. 나고하 씨의 꿈은 드라마에서 봤던 정비된 도로 등 한국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케냐에 도입하는 것이다. 은지오키 씨는 “한국 유학 후 전통 음악과 음식을 케냐 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싶다”고 했다.

앞서 한국관광공사가 10월 111개국 1만2663명의 케이팝 팬에게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케이팝에 대한 관심은 한국 음식(82.7%), 한국 드라마(79.1%), 한국어와 한글(63.8%), 한국 뷰티(63.7%) 등으로 확장됐다. 일반인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세종학당 수강생도 지난해 6만 명을 돌파해 한국 문화 외연도 넓어지는 추세다.

○ 일상의 버팀목 돼준 한류

케이팝의 가사는 세계인에게 단순한 노랫말 이상의 힘을 떨친다. 아랍권에서는 의미가 조금 더 특별하다. 바레인의 5남매 중 셋째, 파티마 무함마드 씨(25·여)에게는 삶의 버팀목이 됐다. 이슬람 금식 성월(聖月)인 라마단을 엄격히 지키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BTS의 노래 ‘Answer: Love Myself’를 들으며 “나를 사랑하거나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만한 일이 아니라고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회계학 공부를 하며 지칠 때마다 BTS의 ‘피 땀 눈물’ 가사를 곱씹었다. 그는 “내가 내린 결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고 확신한다.

많은 케이팝 팬들은 “미국의 힙합이 지위, 재력을 강조한다면 케이팝은 사랑, 희망, 연대 등을 노래한다”고 입을 모았다. “BTS의 노래를 들으면 나 자신을 사랑하고 밝은 미래를 믿고 최선을 다한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고 한 러시아 팬도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가 많지 않았던 가르시아 씨는 “한국 노래를 왜 듣느냐”는 조롱을 받을 때마다 휴대전화로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를 들었다. 그는 “BTS의 노래 가사 중 ‘꽃길만 걷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희망찬 문장”이라고 했다. 브라질에 거주하는 한 케이팝 팬도 “따돌림을 당했을 때 집에 오면 항상 동방신기 노래를 들었다. 혼자 울 때 내 옆에 있었던 건 케이팝뿐이었다”고 전했다.

세계 음악 시장 동향도 영향을 미쳤다. 근래 해외 차트를 점령한 힙합과 라틴 팝이 지나치게 음울하거나 관능에 치중하고 있는 데 반해 케이팝은 밝고 역동적인 분위기, 색채가 폭발하는 이미지를 보여줘 더욱 돋보이고 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알게 됐다”는 한 인도네시아인의 말처럼, 케이팝은 자존감 회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바레인에 거주하는 하나 알리 씨(25·여)는 유튜브로 케이팝을 들으며 자유롭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동경하게 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SM엔터테인먼트 오디션을 봤던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국 발라드를 부른 그 순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바레인에선 여전히 여성이 동일 임금을 받거나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 어렵다”며 “케이팝을 접하면서 모든 문화가 평등, 자유 등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가야금 연주를 앞둔 외국인들. 양지아시안 씨 제공

▼ 소수문화에서 주류로… “한류, 일시적 파도 아니다” ▼

한류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 “동서양 문화가 혼합돼 있어 상대적으로 덜 낯설기에 선뜻 다가갈 수 있다”, “뉴미디어 시대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용도를 극대화했다”고 말한 외국인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한국 특유의 예절이 문화 전반에 담겨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레인의 알리 씨도 “한국어를 접한 뒤 예절에 익숙해졌다. 지금도 바레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한국식으로 먼저 인사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한류의 달라진 위상은 수년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한국 콘텐츠를 즐겨 온 이들에게도 반길 일이 됐다. 일부 팬들은 “친구들 몰래 케이팝을 들으며 SNS에 한류에 대한 편견들을 토로하곤 했다. 이제는 모두가 이해한다”(우크라이나), “2년 전까지만 해도 한류는 나만의 내밀한 문화였지만 지금은 ‘커밍아웃’이 자유롭다”(러시아)고 했다. “예전처럼 대부분 사람들이 한류를 왔다 가는 파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캐나다), “케이팝을 선호하지 않더라도 왜 다른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이해하는 분위기가 됐다”(프랑스), “새로운 수용과 공감의 물결이 시작된 것”(베트남) 등의 말들도 엄연한 현실이다.

최근에는 칠레 정부가 SNS 등을 분석한 빅데이터 보고서에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격화된 시위의 배경으로 케이팝 팬들을 지목해 논란이 됐다. 콜롬비아의 가르시아 씨는 “케이팝 팬들은 아무도 이 얘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케이팝이 소수 문화에서 주류로 도약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촌극일 뿐”이라고 말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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