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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D, 잘쓰면 藥 모르면 毒… 정책 일관성 지켜야 헛발질 피한다[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01-01 03:00:00

‘ISD 약체국’ 이미지 떨치려면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경험이 별로 없는 로펌이 나서도 괜찮을까….”

2015년 10월 한국 정부가 이란의 다야니 가문이 제기한 ISD에 대응하기 위해 한 국내 로펌을 선정하자 법조계와 학계에선 이 같은 우려가 나왔다. 그해 9월 다야니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 계약금을 돌려달라”며 ISD를 제기했다. 국제중재 분야의 한 교수는 “사실 우리가 질 게임이 아니었는데 결국 패소했다”며 “정부의 소송 전략이 미흡했다”며 아쉬워했다.

지난해 12월 20일 한국 정부가 다야니 가문과의 ISD에서 최종 패소하자 앞으로 이어질 ISD에서도 승소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다야니와의 소송 과정 곳곳에서 정부의 허점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물론 ISD 사건은 쟁점과 논리가 제각각 다르고 복잡해 이번에 졌다고 다른 사건이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다야니 사건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철저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 ‘ISD 약체국’ 면모 드러낸 다야니 사건

다야니 사건은 2010년 다야니 가문이 대우일렉을 인수하려다 실패하면서 불거졌다. 당시 대우일렉 우선협상대상자였던 다야니는 한국 채권단에 계약금 578억 원을 내며 투자확약서(LOC)를 제출했다. 하지만 채권단은 다야니의 자금 여력이나 채무 승계 계획 등이 부실하다며 인수 계약을 해지했다. 다야니는 “계약금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채권단은 “계약이 해지된 책임이 다야니에 있다”며 계약금을 내주지 않았다.

2015년 9월 다야니는 ISD 카드를 들고나왔다. 대우일렉 채권단 중 한 곳인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정부의 관리를 받는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넓은 개념의 정부로서 소송 대상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송을 맡은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중재판정부는 2018년 6월 “한국 정부가 계약금과 지연 이자 등 730억 원을 다야니에 지급하라”며 다야니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가 국민 혈세로 토해내야 할 액수가 당초 계약금보다 26%나 불어나 버렸다.

정부는 즉각 판정에 대한 취소소송을 냈다. 다야니 소송의 대상은 정부가 아닌 채권단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애초 ISD의 대상이 아니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취소소송을 접수한 영국 고등법원은 2019년 12월 20일 한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학계와 법조계는 정부의 대응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우선 다야니가 ISD에 나서기 전에 정부가 사전 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다. 국제중재 분야의 한 교수는 “정부는 다야니가 ISD를 제기하기 전에 계약금 일부를 돌려주면서 조정을 했어야 했다. 그러면 물어낼 금액도 줄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2018년 7월 취소소송을 내며 “소송대상은 한국 정부가 아닌 채권단이니 이 사건은 ISD 대상이 아니다”라고 한 논리도 엉성한 측면이 있다. 앞선 소송에서 패소한 논리를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ISD에서 투자의 개념, 정부의 개념이 점차 넓어져 소송 대상에 부처 외에 공기업도 충분히 포함될 수 있다. 정부가 국제투자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안이하게 대응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 급격한 정책 변경이 ISD 패소에 결정타

금융위원회는 2011년 11월 18일 임시회의를 개최하고 론스타가 보유한 외환은행주식 51.02% 중 41.02%를 매각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날 외환은행 노조원들이 서울 영등포구 금융위원회 앞에서 론스타에 대한 징벌적 매각 명령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동아일보DB

ISD는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투자 대상국의 정책이나 법령으로 피해를 봤을 때 해당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중재를 신청해 손해배상을 받게 하는 제도다. 투자자를 보호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각 정부는 국가 간 투자협정을 맺을 때 ISD를 허용하자는 조항을 넣어 자국 투자자를 보호하려 한다.

한국 정부도 해외로 나간 우리 투자자를 보호하려 ISD 조항을 마련했는데 우리가 ISD의 혜택을 받았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들어 거액을 물어내라는 해외 투자자들의 ISD 소식이 줄을 잇는다. 2012년 12월 미국 헤지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5조 원대 소송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 제기된 ISD 누적 청구액(제소 사건 기준)은 7조 원을 넘어섰다. 한국은 어쩌다 ISD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ISD에 취약한 결정적 이유로 정부의 급격한 정책 변화를 꼽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180도 달라지면서 한국 정부를 믿고 투자한 해외 투자자들이 피해를 많이 본다는 얘기다.

일례로 제주 녹지병원 사업은 정권에 따라 결정이 오락가락한 바람에 투자자 피해를 낳아 ISD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중국 상하이시 산하 부동산 개발 전문 뤼디(綠地)그룹은 2011년 12월 제주도와 투자 양해각서를 맺고 778억 원을 투자해 제주 서귀포시 한라산 중턱에 ‘개방형 투자병원(영리병원)’인 녹지병원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 12월 뤼디그룹의 영리병원 사업을 허가했지만 현 정부가 들어선 뒤엔 태도를 바꿨다. 뤼디그룹의 영리병원인 녹지병원이 2017년 8월 개원 허가를 신청했지만 제주도가 머뭇거린 것. 정부 기류가 변해 영리병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결국 2018년 12월 ‘내국인 진료 제한’이란 조건을 달아 개원 허가를 냈다. 병원은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에 반발해 문을 열지 않았고, 제주도는 “정당한 사유 없이 개원 허가 뒤 3개월 내에 개원하지 않았다”며 허가를 취소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을 졸속으로 입안하고 전 정권의 정책을 서둘러 뒤엎어 투자자 피해가 많이 발생한다”며 “정부가 저소득층과 상생을 강조하면서 자꾸 규제를 도입하면 다국적 투자자본에 조 단위 소송을 계속 당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 담당 공무원도, 로펌도 전문성 결여

ISD 대응에서 한국의 또 다른 급소는 정부와 로펌의 전문성 부족이다. 정부가 ISD 담당 공무원에게 순환보직 원칙을 적용하는 점이 대표적인 문제다. 한 대학교수는 “2012년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 뒤 법무부, 금융위원회의 담당자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생길 수 없는 구조”라고 꼬집었다.

공무원들조차 정부의 비효율적인 대응을 불만스러워한다. ISD 실무를 담당했던 부처의 한 공무원은 “ISD가 계속 늘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잘해야 본전’이란 생각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ISD를 총괄해 전담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털어놨다.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기 전에 국제중재 분야 전문가들과 논의하고 자문을 할 필요가 있지만 지금은 로펌에 외주만 주는 상황이다. ISD가 거듭돼도 정부 내에 전문성이 전혀 축적되지 못하는 구조다. 이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문가들로 대응팀을 꾸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로펌도 전문성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정부는 소송에 대응할 때 관련법에 따라 입찰을 거쳐 로펌을 선정한다. 특정 로펌에 대한 특혜 시비를 피하기 위해 보통 각기 다른 로펌을 선택한다. 이렇다 보니 우수한 로펌이 경험을 반복하며 내공을 쌓기 힘들다. 신희택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의장은 “ISD에서 승소한 로펌을 다른 ISD 대응에도 쓸 수 있어야 정부도 유리하고 해당 변호사들도 실력을 키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 ISD, 독 아닌 약으로 쓰려면

거액의 소송이 이어지면서 ISD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학계와 재계에서는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안심하고 투자하고, 반대로 해외 투자를 활발히 국내로 유치하려면 ISD가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남규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국민연금 운용자금이 늘어나 해외 투자처를 계속 발굴해야 하는데, ISD 조항이 없다면 국민연금의 해외자산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ISD가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우리가 얼마나 프로답게 대응하느냐에 달렸다. 그동안의 ‘우리끼리 관행’이 국제 규범과 동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기업에 대한 과도한 정부 간섭과 규제를 손보는 등 글로벌 기준과 맞지 않는 제도와 관행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ISD에 대해 정부가 뒷짐만 지지 말고 범부처 차원에서 체계적인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여태껏 해왔던 대로 아마추어 식으로 대응했다간 국민 혈세만 날리고 한국이 해외 자본의 ‘ISD 놀이터’가 되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조은아 achim@donga.com·김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