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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cm 중1 소년 검객은 5년 뒤 세계1위를 꺾는다

입력 | 2020-01-02 03:00:00

[도쿄 우리가 간다]펜싱 사브르 최강자 오상욱




오상욱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남자 단체 사브르 결승에서 금메달을 확정한 뒤 환호하고 있다. 오상욱은 평소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지만 단체전 경기에서는 팀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큰 소리로 포효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뉴스1

흰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길을 걷다가 모델 제의를 받을 만큼 훤칠한 키…. ‘꽃미남’으로 불리는 외모를 지녔지만 날카로운 검을 잡는 순간 야수로 돌변한다. 펜싱 남자 사브르 세계 랭킹 1위 오상욱(24·성남시청)이다.

찌르기뿐 아니라 베기까지 가능해 펜싱 종목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격렬하다는 평가를 듣는 사브르에서 그는 ‘괴물 검객’으로 불린다. 유럽의 펜싱 종주국 선수들도 그를 만나면 혀를 내두를 정도. 192cm 장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순발력과 유연성을 갖춘 데다 건장한 체격에서 나오는 파워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아시아선수권, 아시아경기,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오상욱은 7월 개막하는 도쿄 올림픽에서 ‘그랜드 슬램’을 노린다. 펜싱은 올해 4월 4일까지의 성적을 기준으로 개인전과 단체전 출전 자격을 부여하는데, 1일 현재 오상욱이 개인 랭킹 1위, 한국이 사브르 남자 단체 1위에 올라 있기 때문에 오상욱은 올림픽 2관왕을 노릴 것으로 기대된다. 진천선수촌에서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오상욱은 “남은 기간 동안은 경기 운영 능력을 키우려 한다. 경기 비디오 분석과 실전 경기와 유사한 훈련을 통해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차분하고 내성적이던 소년 오상욱은 하마터면 펜싱에 입문하지 못할 뻔했다. 초등학생 시절 먼저 펜싱을 시작한 두 살 위 형을 보며 검객의 꿈을 키웠지만, 둘째는 운동선수의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반대로 펜싱부가 없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오상욱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박종한 대전 매봉중 펜싱부 감독의 간곡한 설득으로 한 학기 만에 전학을 결심했다. 박 감독은 “(오)상욱이는 습득력이 남달랐다. 형들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몇 번 보면 동작을 그대로 따라했다. 놓치기가 너무 아쉬워 부모님께 우리 학교로 전학을 여러 번 권유했다. 그때 그냥 놓쳤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어렵게 검을 잡은 뒤 오상욱의 재능은 뒤늦게 꽃을 피웠다. 중학교 1학년 160cm 정도였던 키가 중학교 3학년 때 187cm까지 자라면서 성인 선수에 견줄 만한 힘과 기술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4년 대통령배 전국펜싱선수권에서 당시 세계 랭킹 1위 구본길(31)을 꺾으며 차세대 최고 검객의 탄생을 알린 오상욱은 그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3위에 오르며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오상욱은 2019년 한 해 동안 유니버시아드, 아시아선수권, 세계선수권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휩쓸었다. 선수들 사이에 ‘올림픽 전년도 성적이 좋으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오상욱은 “징크스는 없다”며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2017년에 처음 세계선수권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딸 때 세계선수권이 얼마나 큰 대회인지도 잘 모르고 편한 마음으로 나섰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제 실력이 나오더라.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큰 대회라고 의식하기보다 편안하게 내가 가진 것을 다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나서겠다.”

막 밝아온 2020년은 흰쥐의 해. 쥐띠 오상욱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흰색 펜싱복과 함께 영광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