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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 이유[현장에서/한성희]

입력 | 2020-01-03 03:00:00


한성희 사회부 기자

“2018년 ‘미투’ 운동으로 현안 대응이 많아지며 전반적으로 진정사건 조사가 지연됐다. 한정된 인력으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조사관이 여러 번 교체됐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던 A 씨는 숨이 턱 막혔다. 직장 성희롱에 고통받다가 인권위를 찾은 지 2년이 다 돼 가는데…. 그에게 서면으로 돌아온 답변은 고작 몇 줄짜리 ‘조사관이 바뀐 경위’였다.

A 씨는 2017년부터 약 7개월 동안 직장 상사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했다. 그는 고민 끝에 2018년 2월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기다렸던 조사는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진정을 넣은 뒤 22개월 만에 인권위 측이 일방적인 ‘조정’ 권고를 내렸을 뿐이었다. A 씨는 지금도 같은 직장에서 가해자 B 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며 B 씨를 포함한 직장 동료들에게 2차 가해를 겪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A 씨는 여러 차례 인권위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해 돌아왔다. 심지어 담당 조사관은 모두 5차례나 바뀌었다. 처음 사건을 맡았던 조사관은 장기 교육을 받으러 간 상태였다. 이후엔 같은 해에 조사관이 별다른 설명 없이 3번씩이나 바뀌기도 했다. A 씨는 “조사는 하고 있는지, 누가 조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결국 A 씨는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 감사에 착수한 감사원은 인권위가 ‘국가인권위원회법 구제규칙’을 어겼다고 판단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인권위는 진정을 접수하면 3개월 이내에 진정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부득이한 사유로 조사 기간이 연장되면 진정인에게 사유를 설명해야 한다. 인권위는 감사 결과가 나온 뒤에야 “사건 처리가 지연돼 A 씨에게 심적 고통을 안긴 점을 고개 숙여 사과한다”며 답신을 보내왔다. 답신에는 “조사관 배정과 변경에 대한 진정인 정보안내에 관한 우리 위원회의 명시적 규정이나 매뉴얼은 없다”며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란다”는 문장도 있었다. 인권위 관계자는 1일 A 씨의 진정에 대해 “정말 죄송하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며 “2018년은 ‘미투’ 운동으로 진정이 급격히 늘어났다. 조사관 1명당 사건이 140건 넘게 배정되며 과부하가 걸렸다”고 해명했다.

물론 인권위가 특정 의도로 A 씨의 진정을 무시했다고 보긴 어렵다. 실제로도 당시 인권위는 인력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오랜 고통 끝에 어렵사리 손을 내밀었던 A 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인권위는 바로 그런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당장 조사관 변경 때는 바로 공지하는 등 매뉴얼을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련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공감 능력’이다.

한성희기자 che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