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DB
A 씨(24·여)는 최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과 또 다른 상담 환자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의혹을 받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B 씨(45)가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의 ‘왕진 시범사업’ 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는 B 씨가 진료실에서 벗어나 환자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진료할 수 있다는 의미다. A 씨는 “B 씨의 면허가 취소되지 않은 것도 황당한데, 복지부가 왕진까지 허용해준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B 씨는 환자를 상대로 한 ‘그루밍(가해자에 의한 성적 길들이기) 성폭력’ 외에도 간호조무사를 성추행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11월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 보호기관의 취업도 제한된 상태다. 법원 판결 전부터 B 씨에 대한 의혹이 쏟아지자 2018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B 씨는 환자에게 위험하니 진료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에 권고했다.
이런 논란에도 B 씨가 계속 병원을 운영하며 진료를 할 수 있던 것은 그의 의사면허를 박탈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에 대한 명확한 징계 규정은 없다. 의료법에는 “의료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저지르면 자격을 정지할 수 있다”고만 돼 있다.
● 살인, 성폭행 저질러도 면허 박탈 안 돼
의사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는 직업 중 하나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이 의사의 손끝과 판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범죄, 대리 수술, 마약 투여 등 의료 윤리의 추락을 보여주는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좀처럼 깨지지 않는 ‘철밥통’ 의료면허 시스템이 있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면허를 취소할 수 있는 경우는 △정신질환자, 마약중독자, 금치산자 △자격정지 기간 중 의료행위 △3회 이상 자격정지 처분 △면허 대여 △허위 진단서 작성 및 진료비 부당 청구 등이다. 살인이나 성폭행, 업무상 과실치사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보건당국이 면허를 취소할 수 없다.
2018년에는 한 개인병원 의사가 간호조무사를 12년 동안 성폭행하고 알“을 불법 촬영하고도 여전히 같은 병원을 운영 중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당시 법원이 선고한 형량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 그쳤다. 의사면허를 박탈하지도 못했다. 2016년에는 유명 의료재단 소속 의사가 수면내시경을 받는 환자를 유사 강간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하지만 2018년 복지부가 해당 의사에게 내린 징계는 고작 ‘자격정지 1개월’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범죄 의사들이 면허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 제약이 없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4~2019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자격정지를 당한 의사 74명 중 성범죄가 사유인 경우는 4명에 그쳤다. 이들은 성폭행과 강제추행, 불법 촬영을 저지르고도 모두 자격정지 1개월 처분만 받았다.
간호조무사 등 의사 면허가 없는 무자격자가 의사 대신 메스를 잡는 이른바 ‘유령 수술’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2018년 5월 부산에서는 어깨 수술을 받던 40대 남성이 뇌사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담당 의사는 의료기기 업체 영업사원에게 수술을 맡긴 채 20분 만에 수술실을 나갔다.
대리 수술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병원의 영리 추구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여러 수술을 진행하거나 외래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받으려는 것이다. 의사 인력이 부족한 지방의 중소병원, 환자가 몰리는 성형외과 등에서 주로 이뤄진다. 지난해 1월에는 3년 동안 1000회 이상 쌍꺼풀과 주름제거 수술을 시행한 70대 간호조무사와 지시한 병원장이 붙잡혔다.
● 최근 10년간 면허 재교부율 97%
현행법상 면허 취소가 어렵다면 성범죄 의사의 의료기관 취업을 제한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다. 2012년 개정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은 성범죄 의사의 취업 제한 기간을 10년으로 못 박았다. 하지만 2016년 헌법재판소가 이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범죄의 중대성이나 재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10년 동안 취업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이후 여성가족부가 취업 제한 기간을 최소 6년에서 최대 30년까지 규정한 법안을 내놓았지만 의료계 반발로 ‘최대 10년’으로 조정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취업 제한 기간은 판사가 정하도록 했고, 재범 위험성이 현저히 낮으면 취업 제한을 하지 않아도 돼 처벌 수위는 사실상 후퇴한 셈이다.
불법 행위를 저지른 의사에 대한 처벌이 약해진 것은 2000년 의료법 개정으로 의사면허를 취소할 수 있는 범죄 항목을 현 수준으로 축소하면서부터다. 그 전에는 성범죄 등 일반 형사 범죄로 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으면 면허취소가 가능했다. 당시 정부가 의약분업 파업으로 갈등을 빚은 의료계를 달래기 위한 반대급부로 면허취소 기준을 완화해 준 것이다.
한국은 선진국보다 불법 행위를 저지른 의사에 대한 징계가 약한 편이다. 독일은 의사가 피고인이 되면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의사면허가 정지된다. 일본도 벌금 이상의 형사처벌을 받은 의사는 면허가 정지되거나 취소된다.
의료인의 징계기록을 환자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다. 미국의 뉴욕, 매사추세츠, 텍사스 등에선 범죄기록, 과실로 인한 징계 등도 환자가 알 수 있다. 캐나다도 의료과실 등의 정보를 공개한다.
전문가들은 의사면허 관리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덕선 의협 의료정책연구소장은 ”2, 3년마다 바뀌는 공무원 서너 명이 의료인 수십만 명의 자격을 관리하고 있다“며 ”동유럽과 한중일을 제외한 다수의 국가들은 정부 밖에 의사면허만 전담해서 관리하는 전문기관을 설립해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