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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日 비하로 엿본 한국의 콤플렉스

입력 | 2020-01-04 03:00:00

[그때 그 베스트셀러]1994년 종합베스트셀러 1위 (교보문고 기준)
◇일본은 없다/전여옥 지음/352쪽·6000원·지식공작소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

“요즘 여자들은 영 가정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도시락을 싸주는 대신 편의점에서 쉽게 사서 먹인다. 게다가 외국 남자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쓴다. 어찌나 명품을 좋아하는지 명품 회사의 사장이 매년 감사를 표할 정도다. 아이를 낳지도 않아서 나라의 미래가 불안하며, 남편이 정년이 되길 기다렸다가 이혼장을 내밀기도 한다. 여자들만 문제가 아니다. 정이 각박해져서 모두 같이 밥을 먹고도 제각각 돈을 나눠 내는 문화가 일반화되었고 TV만 틀면 먹방이 난리다. 이렇게 비인간화된 사회가 어찌 될까 걱정이다. 겉보기에만 잘사는 나라일 뿐, 선진국 기술을 베껴 써먹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개성 있는 제품들로만 경쟁할 수 있을 텐데 미래가 불투명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우리나라 얘기 같지만 책 ‘일본은 없다’에 나오는 일본 비판이다. 1993년 11월 당시 언론인이던 전여옥 씨가 출간한 ‘일본은 없다’는 곧바로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이듬해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다.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며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를 애써 눌렀다.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울분의 민족혼을 소설 형식으로 토해낸 것이라면 그 대상을 일본으로 돌렸을 때는 또 다른 베스트셀러가 나왔다.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필두로 ‘국화와 칼’ ‘기호의 제국’ 등 벽안(碧眼)을 통해서도 일본을 파헤쳐 보려 했다. ‘일본은 없다’가 히트를 친 후 곧바로 서현섭의 ‘일본은 있다’가 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일 극일 반일 혐일의 추를 오가며 일본을 소화해 내려 했다.

이제 그런 일본은 없다. 애써 일본과 우리를 여러 틀로 비교하고 우악스럽게 단순화하던 시절은 갔다. 앞서 말한 저 일본 비판을 그대로 우리 사회에 써먹는 ‘꼰대’의 존재가 반증하듯 일본성(日本性)을 찾아내려는―아울러 그 거울상(像)으로 우리 민족성을 찾아내려는―많은 시도는 그저 허깨비 놀음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명품 소비와 저출산과 ‘먹방’을 한데 묶어 비판할 수 있는 용자(勇者)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일본 관련 베스트셀러의 목록은 당시 우리의 콤플렉스와 욕망을 보여줄 뿐이다. 일본을 자세히 알게 되면 틀은 필요치 않다. 한 해 수백만 명이 일본을 드나드는 오늘날 ‘있다’ 혹은 ‘없다’로 ‘퉁 칠’ 수 있는 일본은 없다.

‘일본은 없다’는 이후 저자와 유재순 씨 간의 표절 논란으로 다시 한번 유명해진다. 이후 법원은 저자인 전여옥 씨가 일부 표절했음을 인정했다. 공교롭게도 ‘일본은 없다’가 출간된 해에 일본에서도 ‘추한 한국인’이라는 혐한(嫌韓) 책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국인이 쓴 것처럼 꾸몄지만 저자가 일본인임이 밝혀져 이 책 역시 논란에 휩싸인다. 베스트셀러는 그 사회 욕망의 지표다.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