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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공정함, 편파적 공정함[오늘과 내일/고기정]

입력 | 2020-01-06 03:00:00

경제성장도 공정이 전제돼야 한다지만
그 공정의 결과와 동기는 진짜 공정한가




고기정 경제부장

신도 부러워하는 직장이라는 한국은행은 신입 행원을 블라인드 방식으로 뽑는다. 지원 이력서에 출신 학교 등 개인 식별 정보를 기입하지 못하게 한다. 필기시험 점수가 사실상 당락을 결정한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다. 그런데 한은 측은 블라인드 채용 이후 합격자의 서울대 경제학과 쏠림 현상이 심화됐다고 한다. 필기시험 방식이 이 학과에 더 유리해서다. 한은도 다른 조직처럼 인사·총무를 잘하는 사람, 대외 업무를 잘하는 사람, 조직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고루 필요하다. 지금 같은 채용 방식으로는 사용자의 선발권도, 특정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지원자의 합격 가능성도 모두 제한된다. 의도는 공정했을지언정 결과는 그리 공정하지 않다.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7년 6월 전면 도입됐다. 그 전과 후를 비교해 보니 8대 금융 공기업의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비중이 28.1%에서 22.1%로 감소했다.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이 특히 선호하는 서울 소재 금융 공기업 5곳(금융감독원 KDB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IBK기업은행 예금보험공사)만 보면 기은을 뺀 4곳은 이 비중이 50% 안팎으로 전보다 더 높아졌거나 변화가 없다. 여기에 한국은행까지 포함하면 ‘한금산수’(한국은행, 금감원, 산은, 수은)의 SKY 편향이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 대통령은 2일 신년 합동 인사회에서 “성장의 원동력인 혁신을 뒷받침하는 것도 공정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다. 혁신을 뒷받침하는 게 ‘규제 개혁에 대한 믿음’이 아닌 ‘공정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서 당혹스럽다. 어쨌든 문재인 정부 핵심 어젠다인 공정경제가 올해로 4년 차다. 공정경제의 본질은 자본의 불공정한 시장행위를 정부 개입을 통해 차단하고 시정하는 것이다. 공정에 대한 믿음이 생기려면 그 성과를 체험적이고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텐데, 그동안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공정경제의 세례를 받고 형편이 나아졌는지 의문이다.

공정에 대한 믿음이 생기려면 공정경제의 수단이 공정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지난해 말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경영 참여 목적의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국민연금이 기업의 이사 해임 등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민간 자본을 공적 자본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자본의 일탈행위로 기업가치가 훼손될 경우 주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정권의 입김에 무방비로 휘둘리는 지배 구조와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는 국민연금이 과연 공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가 예산보다 많은 700조 원의 기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 동의와 상관없이 보건복지부 장관이 마음대로 임명한다. 이 때문에 장관 인사검증보다 기금운용본부장 인사검증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여태 묵살하고 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직은 현 정부 들어 아예 논공행상 자리로 전락했다. 전주에서 19대 국회의원을 했던 김성주 이사장은 총선에 출마한다며 지난주 사의를 표명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전주에 있다.

정부가 평창 겨울올림픽 때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때문에 공정의 역풍을 맞았듯 공정이냐 불공정이냐를 판단하는 잣대는 다원적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참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는 시장에서의 공정은 더더욱 선의와 정책 의지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사회주의 경제의 가격 통제가 그랬듯 그 결과는 더 불공정할 수 있다. 공정한 시늉만 하는 어설픈 공정함이나, 공정의 잣대를 상대편에만 들이대는 편파적 공정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