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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보수’ 깃발만 든 진보, 새판을 짜야[오늘과 내일/정연욱]

입력 | 2020-01-07 03:00:00

국보법 폐지, 힘으로 밀어붙이다 무산
‘반보수’ 넘어 진보정책 성과로 말해야




정연욱 논설위원

노무현 정권에서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이부영의 유시민 비판은 주목할 만했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친문 저격수로 나선 진중권이 제3자 평론가라면 이부영은 현장 증인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 무대는 더불어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이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을 때다. 그해 4월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을 차지하면서 기세등등했다. 10석의 제3당으로 약진한 민주노동당은 든든한 우군이었다.

유시민은 최근 한 방송에서 4대 개혁입법이 좌절된 이유에 대해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을 육탄으로 저지해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 잘못이 아니라 야당이 발목을 잡은 탓이라는 얘기다.

협상의 막전막후를 지켜본 이부영은 “완전한 거짓 주장”이라고 작심 비판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언론 인터뷰에서 국보법의 독소조항 삭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부영은 박근혜와 비밀협상을 하면서 국보법 폐지 대신 독소조항을 손질하는 개정안 마련에 의견을 모았다. 국보법 폐지를 우려하는 여당 의원이 60여 명이나 된 분위기도 감안했다.

유시민 등 여당 강경파들은 국보법 폐지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야 협상에 의한 1보 전진보다는 다수 의석의 힘으로 밀어붙이자고 했다. 이 기세에 밀려 어렵게 만들어진 협상안은 결국 파기됐다.

이부영 주장에 대한 유시민의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시민의 메시지는 결국 ‘반(反)보수’ ‘반자유한국당’ 프레임에 맞춰진 듯하다. 반보수 깃발만 들면 자신들의 과오나 책임 문제는 희석시키면서 친문 세력 결집의 호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난해 여당이 군소 야당과 ‘4+1’ 협의체를 만든 이면에도 이 같은 반보수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처음 발의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은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고위공직자 비리를 독립적으로 수사하라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4+1’ 공수처법은 검찰 견제라는 명분으로 강행 처리됐다. 누가 봐도 친문 세력을 겨눈 검찰을 손보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현 정부 출범에 맞춰 이전 정권을 겨냥한 적폐청산 광풍이 휘몰아칠 때 여권은 이런 ‘검찰 개혁’을 언급한 적도 없었다. 검경 수사에 중립을 지켜야 할 청와대에서 수석까지 나서서 친문 실세들을 향한 검찰 수사에 감정적 대응을 하는 것도 보기에 민망하다. 검찰 수사도 피아(彼我)를 가르는 진영 대결의 프레임에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집권 4년차를 맞아 청와대와 정부는 연신 국민들이 체감하는 정책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 위기의 구름은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고, 순항하는 듯하던 북-미, 남북관계도 다시 꼬여가고 있다. 제1야당을 배제한 채 ‘4+1’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강행 처리한 것을 그나마 내세울 만한 성과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16년 전 국보법 파동처럼 친노 진영은 다수의 정치로 밀어붙이다가 역풍을 맞았다. 무기력한 야당도 문제지만 지금 여권의 ‘4+1’ 협의체 또한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정치적 꼼수로 다수의 정치를 가장한 것이다.

노무현은 2004년 5월 연세대 강연에서 “요즘 정치공학 책을 보면 국민을 어떻게 속이고 어디를 자극할까 하는 기술이 수없이 나오는데 답답하다”며 “정치적 술수에서 최고의 단수는 투명과 정직”이라고 했다. 반보수 깃발로 뭉친 ‘4+1’에 기댄 다수의 정치가 여권, 나아가 진보 세력이 취할 최선의 방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