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단 관계자들이 익산 왕궁리 유적 내 정원 유구를 둘러보고 있다. 움푹한 돌을 타고 흐르는 물이 직사각형 수조 안에 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2005년 5월 동서 50m 길이의 대형 저수조가 확인되면서 비로소 왕궁 정원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저수조 역시 아름다운 괴석으로 장식돼 있었고, 물을 수조로 끌어들이는 길은 판석으로 이어져 있었죠. 돌을 이용해 산을 표현한 석가산(石假山) 정원은 보통의 관부에서는 볼 수 없는 호화 시설입니다.
왕궁 정원 터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무늬의 조경석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특히 2006년 11월 저수조 서쪽 바깥에서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합니다. 국내 고고 유적에서 어린석이 확인된 것은 처음입니다. 이를 발굴한 전용호 학예연구관은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것으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근처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왕경 도로(빨간색 실선 안). 도로 위쪽에 세로로 그어진 하얀 실선들은 수레바퀴 자국이다. 문화제청 제공
●왕경(王京)도로 발견
2016년에는 왕궁리 유적 근처에서 왕궁 외부를 잇는 7세기 백제시대 도로(왕경 도로 1개, 임시 도로 2개)가 발견됐습니다. 왕경 도로는 너비가 4.9m로 백제 정전 유적에서 불과 500m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앞서 부여에서도 너비 9m의 왕경 도로가 나왔습니다. 마치 지금의 포장도로처럼 강돌과 자갈, 진흙으로 바닥을 다지는 ‘노체(路體) 공법’으로 길을 닦았습니다. 이 공법이 적용된 도로는 내구성이 좋아 무거운 수레도 버틸 수 있습니다.
임시 도로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차륜흔)과 수레를 끈 마소의 발자국이 발견됐습니다. 왕궁리 왕경 도로는 백제가 익산에 시가지를 조성했음을 보여줍니다. 박순발 충남대 명예교수(고고학)는 “백제가 익산에 단순히 궁궐만 세운 게 아니라 도성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각종 인프라도 깔았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왕경 도로의 단층에는 자갈과 진흙으로 다진 당시 최신 공법인 ‘노체 공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제공
●왕궁 앞 민가를 찾아서
왕궁리 유적은 우리나라 최장 발굴조사 현장이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발굴허가 면적의 한계로 관청가(官廳街)를 추가로 확인하지 못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더불어 광화문 앞 육조(六曹)거리에 주요 관아가 모여 있었던 것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최맹식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궁성과 연계해 좀 더 넓은 지역을 발굴조사하면 관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민속학 조사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학계는 왕궁과 관가 유적 어딘가에 목간(木簡) 형태의 행정기록이 묻혀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왕궁리 궁장 아래 배수로 주변에 저습지가 형성돼 있어 목간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지목됩니다.
익산 왕궁리 유적 전경.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제17화에서 익산 왕궁리 유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