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팬, 가요계 관계자를 안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멜론’의 차트 1, 2, 3위 실시간 그래프 서비스 화면. 현재의 소비 추이를 바탕으로 한 시간 뒤 차트를 굳이 예측해준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캡처
임희윤 기자
지구에 나오자마자 눈앞에는 1부터 12까지가 그려진 동그란 원이 나타났다. 불길한 전조였다. 처음 보는 엄마의 눈이 두 개이고 코와 입은 하나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법을 알기도 전에 나는 제단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사실 세상을 공기처럼 덮고 있었다. 번지수와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것까지는 놀이처럼 즐거웠건만…. 내겐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됐고 거기 적힌 숫자는 운명을 시침처럼 가리켰다. 근 20년간 시험지에 적힌 빨간 숫자가 날 괴롭혔다. 그 신께 복종해야 했다. 때로는 순종했기에 행복하기도 했다.
신앙고백을 아낄 마음은 없다. ‘숫자 신(神)’님(이하 신님)은 위대하다. 그래서 어딜 가나 있다. 이 기괴한 우상은 유일신을 섬긴다는 예배당에조차 앉아 있다. 신도 수, 헌금 액수…. 태연스레. 상석에 가부좌를 틀고. 눈에는 안 보여도 마음으로는 똑똑히 볼 수가 있다.
#2. 신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지배했다. 21세기 들어 그의 교세는 확장일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좋아요’ 수, 동영상 조회수가 이성과 감성을 압도해 개인과 집단에 절대 권력을 부여한다. 아시다시피 권력이란 대체로 거래가 가능하다. 이름 있는 패션 매거진에서도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를 수백만 원에 거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교회에서는 숫자가 큰 이들이 주교 아니면 교주이니까. 숫자가 커지면, 아니 커져야 신도가 따라온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하기, 인기 있는 것으로 인기 있기는 게임의 룰이다. 경향을 넘어 율법이다.
#3. 차트는 이미 찌그러졌다. ‘숨스’(숨쉬듯 스트리밍)와 ‘총공’(총공격)은 이제 아이돌 팬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쇼핑몰도, 때로 정당마저 그것을 조장한다. ‘숨스’를 이길 것은 애초에 숨조차 안 쉬는 기계뿐인 걸까. 음원 사재기 의혹의 진앙지가 바로 기계적 ‘숨스’였다는 점은 조금 아이로니컬하다. 좋아하는 가수의 차트 성적을 올리기 위해 듣든 안 듣든 틀어두고, 친구나 부모의 아이디를 빌려 종일 같은 곡을 재생하는 행위를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해리포터 시리즈’ 속 볼드모트 같은 무명가수가 나타났다고 믿자 열성 팬들은 경악했고 의심했으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4. 신님의 존재감은 불가사의하다. 가히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다. 대화창에 글을 올린 직후에도 내 시선은 이제 티끌만 한 그분에게 먼저 가 닿는다. 수학공식의 아래 첨자만큼이나 작은 ‘1’ 또는 ‘2’, ‘3’ 또는 ‘4’. 미물에 대한 숭앙이 이럴진대 전설은 오죽할까. 트로이카(3), 양대 산맥(2), 최고(1)를 받드는 마음은 ‘화성인’이나 지성인이나 다를 바 없다.
#5. 빅데이터, 스마트의 시대에 신님은 더 노골적이며 거대한 공룡으로 현현한다. 최근 불거진 음원 사재기 의혹, TV 프로그램 시청자 투표 조작 논란 이전에 어뷰징이 있다. 구입뿐 아니라 열람과 공유마저 모두 숫자로 손쉽게 집계돼 공표되는 시대에 팬 활동은 1만 원짜리 CD를 여러 장 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마다 붙어 공공연히 활동하는 ‘보팅 팀(voting team)’ 계정은 인간으로 가동되는 공장이다. 이런 시상식, 저런 설문이 있을 때마다 ‘팀’은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투표를 독려하고 차트를 굴절시켜 매체에 맺히는 인기의 상(像)을 구부린다. 대다수의 활동은 불법도, 아마 부도덕도 아닐 것이다. 차라리 신앙생활에 더 가까울지도….
임희윤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