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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상권 죽이는 ‘뺄셈의 정치’[오늘과 내일/박용]

입력 | 2020-01-10 03:00:00

건물주-상인, 대기업-구멍가게 갈등 대신
공존으로 상권 키우는 ‘덧셈의 해법’ 내놔야




박용 뉴욕 특파원

미국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 3번가 근처에 자주 가던 멕시코 식당이 있었다. 음식도 좋고 가격도 괜찮아 늘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2년여 전 이 식당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식당 사장은 “건물 주인이 월세를 50% 넘게 올려 달라고 한다”고 폐업 이유를 설명했다. 퀸스에서 성공해 맨해튼까지 진출한 사장은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맨해튼 매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멕시코 식당이 떠난 자리는 지금도 비어 있다. 건물주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뉴욕의 한 부동산 중개인은 “맨해튼의 상가 임대차 계약은 10년 단위의 장기가 많다. 여유가 있는 건물주는 월세를 낮추는 대신에 부동산 경기가 나아질 때까지 상점을 비워두고 버틴다”고 설명했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세계의 자본이 모인다. 상가 공급이 제한된 상황에서 불리한 조건으로 장기 계약을 하기보단 나중에 한꺼번에 손실을 만회하는 ‘한 방’을 노리는 것이 건물주에게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공실이 길어지고 손해가 쌓이면 ‘본전 생각’만 커질 수밖에 없다. 건물주가 욕심을 줄이고 월세를 적당하게 올려 멕시코 식당을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건물주도, 식당도, 소비자도 모두 행복한 해법이었을 것이다.

건물주와 임차인 간 갈등은 세계 어느 대도시에나 있다. 해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미국에서 요즘 유행하는 ‘푸드홀(food hall)’ 형태의 복합상가는 온라인 상점에 밀리고 있는 오프라인 상점들의 새로운 경쟁 방식이다. 음식을 먹는 쇼핑객은 그러지 않는 손님보다 평균 35% 더 오래 머물고 25% 더 돈을 쓴다. 인기 식당을 모아 손님들의 발길을 끄는 식의 복합 푸드홀들이 대세로 떠오른 이유다.

노포가 많은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도 중국 대만 등 아시아계 유명 식당과 지역 디자이너숍이 들어선 푸드홀 형태의 복합상가가 이미 들어섰다.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등 음식으로 유명한 나라를 테마로 하거나 외식전문 매체가 인기 식당을 엄선한 곳도 있다. 뉴욕의 오래된 전통시장인 ‘에식스마켓’도 현대식 복합 푸드홀 형태로 바꿔 지난해 문을 열었다.

이런 복합 푸드홀은 임차인들이 기본 월세를 내고 수입이 일정액을 넘으면 건물주와 수익을 나누는 수익 공유형의 ‘퍼센티지 렌트(percentage rent)’를 적용하는 곳이 많다. 상권이 번성해 장사가 잘되면 건물주도 이익을 얻기 때문에 월세를 더 받으려고 잘되는 식당을 내쫓을 이유도 별로 없다.

지역 상인과 주민, 건물주가 현대식 경영 기법을 통해 상권이라는 무형의 공유자산을 유지하고 관리하려는 노력도 있다. 뉴욕에는 건물주, 상인, 지역 정치인들이 참여해 상권 마케팅, 치안 및 거리 미화, 투자 등을 담당하는 비영리 조직인 ‘비즈니스개선지구(BID)’ 76곳이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말 한국의 세계적인 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이 무대에 오른 타임스스퀘어의 새해맞이 행사 ‘볼드롭’도 타임스스퀘어 상권을 관리하는 BID인 ‘타임스스퀘어얼라이언스’가 주도적으로 기획하는 행사다.

건물주와 임차인, 백화점 등 유통 대기업과 구멍가게, 오프라인 상점과 온라인 상점 등으로 편을 가르고 갈등을 조장하는 ‘뺄셈의 정치 문법’은 시장에선 통하지 않는다.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제로섬’ 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골목상권을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면 상인, 건물주, 유통 대기업, 소비자 등 시장 주체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고 상권을 키우는 ‘덧셈의 해법’이 정석이다. 세계 대도시의 역사는 갈등을 부추기는 분노가 현명한 해법으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