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이발사’ 장희선 씨가 지난해 말 은퇴 직전 서울 용산 국방부 내 장군이발소에서 손에 익은 가위와 빗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31일 50년 동안 해오던 장군 이발사 직에서 은퇴했다. 국방일보 제공
장 씨가 군에 처음 발을 들인 건 1968년. 전남 곡성에서 상경해 먹여주고 재워줄 곳을 찾던 그의 눈에 들어왔던 일자리가 당시 서울 용산 육군본부의 장군이발소 견습생 자리였다. 용산역 전봇대에 붙은 구인 전단을 떼어 들고 찾아간 육군본부 입구엔 소총을 맨 헌병이 버티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을 처음 본 시골 소년은 몸을 떨었다. 서슬 퍼런 군부 정권 시절이었다.
장군들 머리를 감겨주고 이발소 청소를 하던 견습생은 몇 년 뒤 육군본부 장군 이발사가 됐다. 이후 국방부 장군이발소로 옮겼다.
장군들이 아침에 이발소를 찾을 때는 긴장한 표정이 많았다. 권위주의 그 자체이던 군의 단면을 보여주듯 장군들은 상관 보고 전 통과의례처럼 이발소를 찾아 드라이를 했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 한 가닥 삐져나오지 않게 매만진 뒤에야 보고에 들어갔다. 손에 포마드 마를 날이 없었다. 장 씨는 “매일 아침 드라이를 하러 오는 장군도 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드라이 손님 10명을 받고 나면 진이 빠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이발소를 채우던 장군들이 어느 날 한 명도 얼굴을 보이지 않아 놀란 적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군 이발사와 보조 직원들이 “간밤에 난리가 났다더라”고 수군댔다. 1979년 12·12쿠데타(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였다.
“우리가 다 퇴근한 밤에 일어난 일이니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 분위기가 싸늘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나요. 나중에 TV를 보고야 12·12 사태라는 걸 알았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장 씨는 군의 변화를 체감했다. 우선 ‘보고용 머리’를 하러 오는 장군이 줄었다. 그는 “지금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드라이를 하러 오는 장군은 없다”고 말했다.
장 씨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장군이발소는 국방부 제1이발소에서 제2이발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대신 영관급 이하 장교 및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한 이발소인 제2이발소가 제1이발소가 됐다. 이런 변화 역시 권위주의 탈피를 위한 군의 노력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풀이된다.
이발사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던 장군들이 말이 많아진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장 씨는 “내 나이가 장성들과 비슷해져 편안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과거처럼 이발소에서 입을 닫고 있는 장군은 별로 없다”며 “이제는 소소한 대화가 곧잘 오간다”고 했다. 장 씨에게 준장 시절부터 대장, 국방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줄곧 머리를 맡겼던 전직 장관들 중에는 장관직을 내려놓거나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종종 연락해 안부를 묻는 인물도 있었다.
장 씨가 50년간의 장군 이발사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던 날 그의 단골 고객인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장 씨와 그의 아내를 장관실로 초대해 환담을 나누고 감사장을 수여했다. 국방부 장관이 이발사를 직접 챙기는 것은 과거엔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감사장엔 “국방부 직원 복지 향상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내용과 함께 “유능한 안보, 튼튼한 국방에 이바지했다”는 문구가 담겼다.
장 씨는 최근 장군들 모습에 대해 “예전엔 식사 후 또는 이발 후에 장기, 바둑을 두거나 하면서 여유 있어 보였는데 요즘은 머리를 자르다 말고 중도에 나가는 일도 흔하다”며 “장군들 업무 환경이 더 빡빡해진 것 같다”고 했다. 특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는 등 북한의 도발이 집중됐던 2016년과 2017년엔 이런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나에게 머리를 맡겨준 모든 장군들이 고맙지요. 갈 곳 없던 나를 거둬주고 키워준 국방부에 무엇보다 감사해야죠. 군에서 50년 넘게 혜택을 받았으니 군에서 쌓은 실력으로 주변 노인들 머리를 이발해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살려고 합니다.”
▼“상경 와중에 52년간 생이별… 어머니-여동생 꼭 찾아야죠”▼
장희선 씨가 50년 넘게 찾고 있는 어머니 김태순 씨와 여동생 희자 씨의 옛 모습. 이 사진은 어머니 김 씨가 1964년 아들 장 씨에게 쓴 편지에 동봉해 보낸 것이다. 장희선 씨 제공
▷장희선 씨는 인터뷰 말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꼭 찾고 싶다는 말이었다. 1968년 그는 서울로 돈 벌러 간다며 먼저 고향을 떠난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겠다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당시 어머니는 곡성에 있던 장 씨에게 “곧 데리러 가겠다”며 보낸 편지에 주소 대신 ‘동대문에서’라는 글귀만 남겼다. “동대문에 가면 대문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 보니 여기도 동대문, 저기도 동대문 사방팔방이 다 동대문인 겁니다.” 그는 “이발사 일을 하며 어느 순간 포기하고 살았는데 뒤늦게라도 꼭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고 싶다”며 울먹였다. 장 씨는 과거 어머니가 보내온 사진을 기자에게 보내며 “어머니가 살아계실지 모르겠지만 꼭 찾아 달라”고 당부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