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윈도페인팅 아티스트’ 나난 2004년 어느밤 유리창에 그린 그림, 아침 햇살에 비치자 놀라운 무늬로 그때부터 국내엔 없던 길 걸어와 서울역 80m 유리는 거대한 화폭, 계단틈 잡초도 화분 그려주니 ‘작품’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광주요 전시장에서 만난 아티스트 나난. 다양한 패션, 화장품 브랜드와 협업해 온 그는 광주요 도자기 그릇에 잎사귀와 꽃 등 자연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들고 있는 화분에는 시들지 않는 종이꽃이 담겨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새해 벽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광주요 매장에서 국내 최초의 ‘윈도페인팅 아티스트’ 나난(본명 강민정·41)을 만났다. 이곳에서는 나난 특유의 자연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짙은 초록색 잎사귀와 하늘색 국화꽃을 그려 넣은 도자기 그릇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그는 도자기가 가마 속에 구워지면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6차례나 테스트한 끝에 원하는 초록색을 찾아냈다고 했다. “과거에 선비가 우물가 아낙네에게 물을 청할 때 체할까 봐 잎사귀를 띄워 줬다잖아요? 국화는 서리가 내리는 날씨에도 꼿꼿하게 꽃을 피워냅니다. 험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식탁에서만큼은 잎사귀를 띄워 줬던 사려 깊음, 국화의 강인함을 채우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됐습니다.”
서울예술대에서 광고창작을 전공한 나난은 1999년부터 스트리트 매거진 ‘런치박스’와 LG텔레콤에서 발행한 ‘카이’ 매거진에서 에디터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에서 출발한 그의 캔버스는 다양한 변신을 거듭했다. 먼저 유리창. 2004년에 친구 집 창문에 흰색 마커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밤중에 그렸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탄성이 흘러나왔다. 햇빛이 비친 그림자가 방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냈던 것. 카피라이터였던 친구는 ‘윈도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그는 국내 첫 윈도페인팅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유리창에 그림을 그렸고, 1년 뒤엔 뉴욕, 런던, 홍콩에서 윈도페인팅 전시회를 열었다.
미국 뉴욕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상점 창문에 그려진 나난의 윈도페인팅. 나난 제공
그를 진정한 ‘효녀’로 느끼게 만들어준 작업은 2015년 신세계 SSG와의 협업이었다. 이번엔 캔버스가 노란색 배송차였다. “엄마는 아무리 비싼 화장품이나 명품 패션과 협업해도 브랜드를 잘 모르셨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노란색 배송차를 볼 때마다 ‘우리 딸이 한 작업’이라며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는 우연히 자신의 서울 이태원 작업실 앞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땅에 조그만 화분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른바 ‘나난 가드닝’ 프로젝트. 이번 캔버스는 시멘트 계단이었던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마을도시재생 사업의 매뉴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실험은 ‘롱롱타임플라워’로 이어졌다. 친구 결혼식 때 종이로 만든 꽃을 부케로 주었더니 “어머, 시들지 않는 꽃이네!”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전시에서 나난 꽃집을 열었다. 종이로 만든 꽃을 송이당 5000원에 팔아 관람객들이 자신만의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