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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조서만으론 증거 부족”… 법정진술 중심 재판이 무죄율 높였다

입력 | 2020-01-11 03:00:00

[위클리 리포트]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작년 150명 무죄선고 분석해보니




서울중앙지법 합의부가 재판을 하는 법정. 법정 가운데 재판장인 부장판사가 앉고, 양옆에 배석판사가 자리한다. 형사합의부는 주로 징역 1년 이상인 형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사회에 미칠 영향이 큰 재판을 맡는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2018년 사기와 횡령 혐의로 기소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에서 재판을 받아온 A 씨는 지난해 두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가 밝힌 무죄의 이유는 두 혐의 모두 ‘증거 부족’이었다.

배임수재와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같은 법원의 형사합의33부에서 재판을 받은 B 씨에게도 지난해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가 B 씨에 대해 선고하면서 설명한 무죄의 이유 중에는 ‘검찰이 법리 적용을 잘못했다’는 취지의 내용이 포함됐다.

A, B 씨처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에서 재판을 받은 피고인 가운데 지난해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은 모두 150명이다. 혐의별로는 특정경제범죄법 위반(횡령, 배임, 사기 등)으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이 48명으로 가장 많았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조세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무죄가 난 피고인도 33명이나 됐다. 성범죄 피고인 중 무죄로 결론이 난 피고인도 16명 있었다.

무죄가 선고된 150명 중엔 2개 이상의 범죄 혐의로 기소됐거나 하나의 혐의로만 기소됐어도 공소사실에 여러 차례의 범죄 행위가 기재된 피고인이 134명이었다. 이른바 ‘통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들이다. 본보가 이들 134명 가운데 126명의 판결문을 보니 무죄가 선고된 이유의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었다.


○ 일방 주장에 의존한 기소


검찰이 고소·고발인이나 피해자 등 한쪽 얘기만 듣고 기소를 했다가 무죄로 이어진 경우다. 법원은 사기 혐의로 기소된 C, D 씨에게 지난해 10월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고소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피고인들이 서로 짜고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학교 부지를 싼값에 매입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속여 고소인에게서 돈을 받아 챙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소인의 진술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다. 고소인과 같은 주장을 하는 제3자 증인이 아무도 없었고, 고소인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다른 물적 증거도 없었다.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고소인은 자신이 관련된 다른 형사사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피고인들을 무리하게 고소한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고소인은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하는 때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고소를 했는데 이 고소가 자신이 기소를 당한 다른 형사사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고소인 말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수사 단계에서 이 부분을 지적하고 기소하지 않거나 최소한 공소사실을 수정하거나 해야 한다”며 “고소인 주장을 그대로 요약해 놓은 듯한 공소장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공범으로 기소가 됐는데 주범과의 공모 관계가 입증되지 않아 무죄가 난 피고인들도 있었다. 사기 혐의로 주범과 함께 기소된 한 피고인은 이런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주범에게는 징역 3년이 선고됐다. 공범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 재판부는 대부분 “법리상 공범으로 인정되려면 단순히 범행에 협조한 정도가 아니라 범행 의사가 합치해 실행에 옮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 공판 중심주의 강화의 영향

수사 기록 등 서류 중심의 재판이 아니라 공개된 법정에서 이뤄지는 진술을 근거로 재판을 해야 한다는 ‘공판중심주의’ 강화의 영향으로 보이는 무죄 선고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한 해안에 정박해 있던 배에 불을 지른 혐의로 국내 원양업체 직원 3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이들과 함께 일한 외국인 선원들의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피고인들의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진술서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진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진술서를 작성한 외국인 선원들은 거주지가 모두 외국으로 돼 있어 증인으로 법정에 직접 나와 진술하지 못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 진술자의 해외 연락처나 주소 등을 확보하고 재판 진행 상황에 따라 일시 귀국해 법정에서 진술하게 하는 방안을 확보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다했다고 볼 자료가 없다”고 했다. 보험사기와 현주선박 방화 혐의로 기소됐던 선원 3명은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실제 서울중앙지법의 형사합의부 재판장 가운데 60% 이상이 ‘공판중심주의로 무죄율이 높아졌다’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도 있었다. 서울에서 근무 중인 한 판사는 “수사 단계에서 작성된 진술조서의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공판중심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 법원, 수사기관과 다른 해석

하나의 사실 관계를 두고 법원이 검찰과 다른 해석을 내리면서 무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공연·행사업체를 운영하는 E 씨의 경우가 그랬다. E 씨는 중국에서 국내 유명 영화배우의 팬미팅을 열려고 한다면서 이에 필요한 자금 수억 원을 한 거래처로부터 빌렸다가 갚지 않아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E 씨가 중국에서 팬미팅을 열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고 봤다.

하지만 법원은 E 씨 회사의 직원이 유명 영화배우의 소속사 대표에게 회사 소개서와 팬미팅 기획안을 이메일로 보낸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피고인이 중국에서 팬미팅을 할 배우를 섭외하는 데 실패를 한 것이지 처음부터 팬미팅을 진행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 씨 회사가 이런 내용의 이메일을 배우 소속사 측에 보낸 적이 있다는 사실은 검찰도 알고 있었고 관련 내용을 수사기록에도 포함시켰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두고 법원처럼 해석하지는 않았다.

검찰이 사실관계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고 피의자를 재판에 넘겼다가 유죄 판결을 받아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세금계산서를 허위 발행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있었는데 재판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 피고인이 발행한 세금계산서와 관련된 거래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피고인이 직접 국세청에 심사를 요청했는데 ‘매입 실적 확인문서 등을 통해 매출이 있는 실물거래라는 것이 확인됐다’는 회신을 받아낸 것이다. 이 사건 재판을 맡았던 재판장은 “실제로 거래가 발생한 계산서라는 걸 세무당국이 확인을 해줬는데 수사기관은 이런 간단한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기소를 한 것”이라고 했다.


○ 검찰 “주요 사건 법원 기준 엄격”

단독 재판부에 비해 합의부 사건의 무죄율이 높은 데 대해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절도 등 단독 재판부에 배당되는 사건은 유죄가 명백한 경우가 많은 데 비해 합의부 사건은 유무죄를 치열하게 다투는 사건이 많다”고 했다. 또 다른 검사는 “법원의 기준이 일관되지 않을 때도 있다”며 “특히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경우에는 법원이 유죄 입증의 기준을 유독 엄격하게 적용하고 그렇지 않은 사건에선 상대적으로 기준을 느슨하게 적용하는 것 같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의 1심 형사재판 중 합의부에서 선고된 무죄 비율은 8.9%, 단독 판사가 선고한 무죄 비율은 4.4%다. 합의부 무죄율이 단독 재판부 무죄율의 2배를 넘는다. 전국 법원의 평균에서도 합의부 무죄율(4.9%)이 단독 재판부(3.0%)보다 높다.

박상준 speakup@donga.com·김예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