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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길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MONDAY DBR]

입력 | 2020-01-13 03:00:00

청나라 말 베이징의 과거시험장.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중국 송나라(宋·960∼1279) 건국자들의 가장 큰 소망을 꼽자면 바로 자신들이 세운 통일제국이 당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었다. 지역 지배층이 하나둘 독립하면서 박살 나버린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 조정은 지역 세력을 정복할 때마다 이들의 지배층을 송나라 수도인 개봉(開封)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하지만 큰 나무를 뿌리째 뽑은 자리에 반드시 다시 큰 나무가 자라나듯, 지배 세력을 뽑아낸 지방에도 결국 새로운 지배 세력이 피어난다. 개봉에 자리 잡은 ‘중앙’의 입장에선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중앙이 영원히 중앙으로 남아 지방의 어깨 위에 서 있기 위해서는 지방을 장악한 호족들을 계속해서 수도 개봉으로 불러들여야만 했다.

송나라의 두 번째 황제가 된 태종(太宗·939∼997)이 전면적으로 확장한 과거(科擧)제도는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주는 듯했다. 태종은 당나라 때 33명에 불과했던 과거 등용 인재를 3년에 1400명 정도로 대폭 늘려 뽑았다. 이로 인한 지방과 수도의 인적 교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총 3차 시험으로 진행됐는데, 개봉에서 열리는 2차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1차 시험 합격자 수가 적게는 5000여 명에서 많게는 2만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 같은 송나라 조정의 노력에도 지방 세력의 불만을 쉽게 잠재우진 못했다. 과거제도의 지방 통제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합격자 지역 할당제가 필수적인데 송나라 조정은 이 지점에서 망설였다. 1차 시험의 경우 철저히 할당제를 적용했지만 2차 시험은 출신 지역을 고려하지 않고 시험 성적만으로 당락을 결정했다. 문제는 지역별로 경제적, 문화적 인프라 차이가 컸다는 데 있다. 송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강남(남중국)은 사상 처음으로 인구와 경제력 측면에서 강북(북중국)을 압도하게 된다. 강남 출신 호족들은 높은 경제력에 힘입어 풍부한 문화 자본을 축적하고 질 좋은 교육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2차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송나라가 건국한 지 채 100년이 되기도 전에 이러한 지역 간 불균형은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현저해져 특히 큰 손해를 본 강북 출신들이 2차 시험 지역 쿼터제 도입을 주장하게 됐다. 위대한 사학자이자 정치인인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강북을 대표해 나서 강남을 대표하는 대문호 구양수(歐陽脩·1007∼1072)와 이 문제로 일대 논쟁을 벌였을 정도다. 조정은 결국 강남의 손을 들어줬다.

정치인 선발 시험을 강남 출신이 점차 장악해가는 상황에서 강북 각 지역의 지배 세력은 조정에 ‘목소리’를 전달할 인적 통로를 잃었다. 북중국 출신의 인재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송나라 조정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정에 대한 애착과 소속감을 갖기란 어렵다. 같은 동네 출신들이 과거시험에 쭉쭉 합격해서 고관대작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연락해서 목소리를 전달하기라도 할 텐데, 그런 통로가 없으니 몇 번의 과격한 호소만으로도 반란군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12세기 초, 여진족이 침입해 북중국을 비교적 손쉽게 장악하고 금나라(金·1115∼1234)를 세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지역에 대한 송나라의 인적·정서적 지배력이 약했다는 현실이 있다.

침묵이 좋아 침묵하는 이는 드물다. 차를 몰고 국회로, 기업으로, 대사관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도 있다. 회의실에서, 강의실에서, 내무실에서, 거실에서, 술자리에서 사흘째 아무 말도 않는 이가 있다면 그를 잘 살펴보자. 말을 전할 통로가 막힌 송나라의 강북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을 느끼는 것 아닐까. 그의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발언권을 줘보자. 여진족의 공격에 모래알처럼 흩어진 강북 사람들과 달리 당신과 함께 맞서 싸워줄지도 모른다.

이 원고는 동아비즈니스리뷰(DBR) 288호에 실린 ‘말 않는 이 있다면, 발언권부터 줘 보라’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안동섭 중국 후난(湖南)대 악록서원 조교수 dongsob.ahn@univ.ox.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