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 <6> 유승민 IOC위원 겸 탁구협회장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인 2020년은 한국 스포츠도 100년이 되는 해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설립된 후 한국 스포츠는 우리 사회 어느 분야보다 빠르게 눈부신 발전을 해 왔다.
그렇지만 한 세기를 보낸 한국 스포츠는 어느 때보다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인구 감소와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는 한국 스포츠의 근간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엘리트 스포츠뿐 아니라 생활 스포츠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이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한국 스포츠는 2020년을 ‘또 다른 100년’을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100주년을 맞는 동아일보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출생률 저하와 이에 따른 인구 감소는 엘리트 스포츠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 인생을 운동에 거는 소년 소녀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각해도 10명 중에 1명이 뽑히는 국가대표 선수의 기량과 1000명 중에 1명이 뽑히는 다른 나라 국가대표 선수의 기량은 분명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이다. 중국은 자국에서 치렀던 2008 베이징 여름올림픽 종합 1위를 비롯해 2000년 이후 치러진 모든 올림픽에서 종합 3위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내가 몸담았던 탁구 종목에서는 어떤 나라도 넘어서기 어려운 만리장성을 완성한 상태다. 1억3000만 인구와 풍부한 생활체육 저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본 스포츠의 저력도 무시하지 못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탁구를 포함해 모든 스포츠가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 10대 어린 탁구 선수들 가운데 두각을 보이는 선수들은 대부분 탁구선수 출신 부모들의 자녀들이다. 탁구계에서는 “2세 선수가 없으면 탁구 칠 선수가 없겠다”는 자조 섞인 농담까지 나온다. 최근에는 탁구뿐 아니라 야구, 농구 등 종목을 불문하고 많은 선수들이 ‘왕년의 스타’를 어머니나 아버지로 두고 있다. ‘유스 풀’이 말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생활체육 저변 확대를 추진하는 현재의 스포츠 정책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 스포츠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세계 정상급의 선수가 나올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클럽 스포츠 활성화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정책이 결실을 맺으려면 학생들의 ‘운동권’을 보장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학교 체육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고등학교의 체육 시간은 공부를 위한 자습 시간이 된 지 오래다. 예체능의 경우 학창시절에 받았던 교육이 사회인이 된 후의 취미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최소 한 종목 이상의 체육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클럽스포츠 활성화도 탁상공론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외국 선진국 아이들은 운동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의식주처럼 인생을 건강하게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 스포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학교에서 체육을 의무적으로 교육하고 장려한다. 얼마 전 내가 운영하는 탁구 클럽에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 학생은 “독일에 있는 고교에 진학하려고 하는데 스포츠 한 종목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하지 못하면 입학이 어렵다”고 말했다. 선진국들에서는 스포츠가 가지는 교육적 가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전 국민의 건강까지 염두에 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체육이 입시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스포츠는 교육적인 가치가 크다. 단체 종목이라면 협동심과 팀워크를 배운다. 부끄럽게도 최근 몇몇 체육인들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스포츠가 강조하는 페어플레이 정신과 규칙준수 등을 통해 올바른 인성을 함양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스포츠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많다. 그런 것들도 운동과 스포츠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서 몸을 부딪치고, 땀을 흘리면서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학교 체육이 활성화되면 생활체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엘리트 체육’ 역시 함께 강해질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취미로 스포츠에 입문했다가 전문 체육인을 꿈꿀 재능 있는 선수들이 발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에서, 현재의 생활 스포츠 확대 정책과 함께 전문 체육인을 꿈꾸는 학생들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도 함께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활 스포츠 저변 확대라는 현재 정책의 방향성은 적극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엘리트 체육과 생활 스포츠의 경계를 나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 생활체육 활성화와 엘리트 스포츠 육성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수영 박태환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에서 선전하면서 수영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김연아가 피겨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몇 안되던 아이스링크에는 피겨스케이트를 배우는 아이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두각을 보이고 있는 유영은 그런 ‘김연아 2세대’가 엘리트 스포츠 선수로 성장한 케이스다.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는 선수들에게 올림픽은 꿈의 무대다. 우리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들도 존중해야 한다. 스포츠 선진국들은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 또는 운동이라는 이분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꿈을, 선수들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환경을 만들고 최대한 지원하려 한다.
엘리트 스포츠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면 엄청난 일들도 해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88년 서울 여름올림픽과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이다. 한국의 위상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상승했다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분야가 많지 않던 당시 우리나라는 올림픽에서 세계 4위라는 기적 같은 성과를 달성했고, 이후 한국은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국가로 발돋움했다.
서울올림픽이 경제 성장의 도화선이 됐다면 평창 겨울올림픽은 남북 화합의 밑거름이 됐다. 남과 북이 한 팀이 되어 뛰었던 여자 아이스하키는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 대치 분위기에 봄꽃을 피웠다. 같은 해 4월 성사된 남북 정상회담은 평창에서 오간 남북 교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스포츠는 국민들을 웃고 울리며 많은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 스포츠는 이제 달라진 환경에서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 한국 스포츠는 늘 불가능에 도전해 왔고, 거기서 이겼고, 성과를 거둬 왔다. 지금의 어려움도 ‘한국 스포츠 200년 역사’에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멋진 도전과 성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과거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던 선배 선수로서, 지금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자 한 종목의 단체장으로서, 또 한 번의 스포츠 100년의 역사가 성공적으로 써지도록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탤 것이다. 동아일보와 독자를 비롯한 모든 국민 여러분께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국 스포츠에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