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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변함없는 재계순위… ‘무서운 신인’이 안나온다[광화문에서/김현수]

입력 | 2020-01-14 03:00:00


김현수 산업1부 차장

“왜 10대 그룹은 거의 변하질 않을까요?”

지난해 12월 한 재계 경영인의 모임에서 이 같은 질문이 나왔다. 최근 20년 동안 한국의 10대 그룹에 오르는 기업의 이름이 손 바뀜 없이 거의 그대로인 데 대해 이유를 물은 것이다. 누군가 “삼성, 현대차, SK 등 주요 그룹이 너무 잘해서?”라고 반문했다. 다른 누군가는 “한국 산업구조가 고착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해석은 주요 그룹 경영자인 A 씨로부터 나왔다.

“10대 그룹 밑 기업들이 위로 올라오지 않으려 하거든요. 올라가 봐야 특별한 이득이 있나요? 오히려 ‘대가’만 치르게 됩니다. 앞으로도 기업 양극화는 심해질 것이고, 잘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반기업 정서도 더욱 강해질 거예요.”

‘공룡 기업’으로 찍히면 반기업 정서의 타깃이 될 뿐 아니라 규제당국의 ‘맞춤형 규제’ 대상이 될 수 있으니 10대 그룹이 되고 싶지 않은 ‘피터팬 신드롬’이 작용한다는 의미였다. 상위 기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늘어날 것이란 A 씨의 예측에 참석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편향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중소·중견 기업 오너를 만나 보면 같은 말을 하는 걸로 봐서 A 씨의 분석을 터무니없다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로부터 1960년부터 2019년까지 자산 기준 10대 그룹 명단을 받아봤다. 1960년에도 1위는 삼성이었지만 낯선 기업이 적지 않았다. 삼호, 개풍, 대한 같은…. 1972년에는 국내 최대 자동차 회사이던 신진자동차, 건설로 급성장한 현대 등이 명단에 새로 등장했다. 1980년에는 대우, 선경(현 SK) 등이, 1990년에는 ‘봉고’로 인기몰이에 나선 기아자동차, 쌍용, 롯데 등이 ‘뉴 페이스’였다.

하지만 2000∼2019년에는 이렇다 할 신진 그룹을 찾기 어려웠다. 현대그룹이 계열 분리되고, LG와 GS가 헤어짐에 따라 생긴 순위 변동 정도였다. 특히 5대 그룹은 2005년 이후 15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

미국은 어떨까. 2000년, 2010년, 2020년 파이낸셜타임스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 명단 등을 찾아보니 20년 동안 시장가치 기준 5대 기업 자리를 지킨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뿐 나머지는 계속 바뀌었다. 2000년에는 제너럴일렉트릭(GE)이, 2010년에는 엑손모빌이 1위였다. 2020년에는 1월 4일 기준 애플, MS, 알파벳(구글 모기업), 아마존, 페이스북 순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이 기업들의 평균 나이는 30.6세다.

미국과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은 좁은 내수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기업이 여러 위기 속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박수 받아 마땅하지만 20년 동안 ‘무서운 신인’이 없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한 5대 그룹 계열사 사장은 “요즘만 같아선 규제든 여론이든 리스크가 커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기업가 정신이 가장 활발해야 할 민간 기업 분위기가 이렇다. 이대로라면 2030년 주요 기업 명단도 똑같을 것 같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