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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에게 약한 日 보여준 곤 전 회장의 극적인 탈주[광화문에서/박형준]

입력 | 2020-01-15 03:00:00


박형준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의 나리타공항과 하네다공항, 오사카의 간사이공항, 나고야의 주부공항에는 개인 제트기 이용객을 위한 전용 출입구가 있다. 개인 제트기로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은 많게는 수억 원. 그런 부유층을 유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간사이공항에는 2018년 6월 ‘프리미엄게이트 다마유라(玉響)’가 설치됐다. 약 300m² 넓이의 공간에 라운지, 회의실, 흡연실 등이 갖춰져 있다.

다마유라를 한 번 이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20만 엔(약 210만 원). 비싼 만큼 혜택이 많다. 우선 외부에서 차를 타고 곧바로 다마유라 앞까지 갈 수 있다. 차에서 짐을 꺼내 다마유라로 가면 세관, 출입국관리, 검역을 한꺼번에 끝낼 수 있다. 짐을 체크하는 보안 검색대도 있다. 한 번에 수속을 끝낸 뒤 다마유라 출입문 맞은편에 있는 연결 통로를 통해 개인 제트기에 곧바로 탑승할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기장 판단에 따라 짐 보안 검사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초특급 서비스가 하나 더 있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일반 여객기와 달리 개인 제트기는 대기업 경영자, 유명 배우, 음악가 등 한정된 VIP들이 이용한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개인 제트기에서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짐 검색을 의무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출발 직전 시간에 쫓겨 다마유라로 허겁지겁 달려온 VIP는 아무 검사 없이 그대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게 다반사였다.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자동차 회장(66)은 이런 허점을 이용했다. 그는 재판 중인 상태여서 일본을 떠날 수 없었지만 지난해 12월 29일 음향장비를 싣는 대형 상자에 숨어 다마유라를 거쳐 개인 제트기에 실렸다. 그러곤 터키 이스탄불로 출국했다. 도쿄신문은 8일 “일본 출입국관리 당국은 비정규직 외국인 체류자에게는 엄격하지만 (부유층인) 곤 전 회장에게는 너무나 느슨했다”고 꼬집었다.

일본에 살다 보면 이 신문의 지적에 공감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월 도쿄에서 살 맨션을 구할 때였다. 초등학생 딸들이 있어 아래층에 소음 피해를 줄까 봐 걱정됐다. 그런데 일본인 부동산 관계자는 “걱정 안 해도 된다. 기자라는 사실을 알면 아래층에서 항의를 안 할 것이다. 일본은 강자에게 약하다”고 말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파견 와 도쿄 도심에서 사는 공무원, 기자, 대기업 주재원 등을 소위 ‘강자’로 분류했다.

하지만 한일 관계가 사상 최악이라고 불렸던 지난해 여름, 일부 재일교포는 일본인들의 차별에 시달렸다. 교포 중에는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에 징용당해 온 한국 노동자의 2세, 3세가 많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관계자는 “한일 관계가 나쁘면 교포들의 삶은 팍팍해진다. 집을 옮겨야 하는데 일본인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교포들에게 집을 임대해주지 않는다. 표 나지 않게 차별하기 때문에 뭔가 항의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어 중에 ‘나가이모노니마카레루(長いものに卷かれる)’라는 말이 있다. 연장자나 힘이 센 사람을 거스르지 않는 게 좋다는 의미다. 곤 사태도 그런 일본 기질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닐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본 스스로 강자에게 약한 모습은 없는지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